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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글방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 없었을까

by 嘉 山 2022. 4. 12.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 없었을까 / 황정혜

 

셋째 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묻지도 못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걱정만 했는데 10년이나 걸렸다. 임용 고시에 떨어지고 처음 취업한 곳은 사립유치원이었다. 이론상으로는 아는 게 많아 이력서와 원장 면접만으로 바로 출근했다. 아이들이 예뻐보이고 함께 지내는 시간이 즐거워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무 경험이 많이 없어서 힘들어했다. "엄마 유치원은 나하고 안 맞나 봐." 그 후로 전공 살리는 것은 포기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지금 하는 일이 적성에 맞고 입소문을 타서 소개해 주는 사람들이 많아 행복하단다. 자신감을 찾았는지 지난 얘기를 꺼냈다. "30여명의 원생들을 돌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피아노 학원을 데려다 주어야 할 아이를 잃어버려 문구사 앞에서 찾았어요. 시말서를 쓰고 꾸중을 들었는데 며칠 뒤에 또 다친 아이가 생겼어요. 시티(CT) 촬영까지 했는데 다행히 가벼운 상처였어요. 원장님은 부모에게 사과하느라 쩔쩔 맸어요." 세 달 만에 그만 두게 되었다. "그 때 원장님은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 없었을까요?" 딸의 눈시울이 촉촉해진다.

 

이 얘기를 듣고 35년 전 일이 생각났다. 시간이 흘러도 또렷하게 기억된다. 둘째 딸이 유치원에서 그네 타다 남자애가 밀쳐서 떨어졌다. 울다가 잠든 애를 하원 시키려는데 걷지를 못했다. 그때서야 병원 가니 골절이란다. 몇 시간 동안 아픈 아이를 방치했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유치원에 책임을 묻고 싶었다. 밀친 아이 부모에게도 사과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놀다보면 이런 일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속으로 삼켰다. 발가락만 내놓고 허벅지까지 감싼 석고 깁스는 무거웠다. 더운 날씨에다 다섯 살 아이에겐 고통스러웠다. 끌고 다니느라 뒤꿈치는 구멍이 났다.

 

두 달 뒤 깁스를 풀고 나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 책 읽기를 좋아해서 밥 먹거나 화장실 갈 적에도 책을 들고 다녔다. 교과서에 나오는 글씨처럼 글씨체가 곧고 정갈했는데 완전히 삐툴삐툴 했다. 성격도 예민하고 까칠해졌다. 나중에야 척추측만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방학 때는 서울에 있는 전문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했다. 오래도록 보조기를 착용하니 힘들고 불편해했다. 하루는 울면서 전화해 부랴부랴 올라갔다. 한참 예민한 사춘기에 어른 환자들이 '병신'이라고 해서 서러웠단다. 유치원 다닐 적에 선생이 잘 봐주었으면 이런 고생은 안 시킬 건데 하는 원망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사과를 받아내고 퍼붓기라도 했어야지 어리석은 내 자신이 미웠다.

 

딸은 식품 영양학을 전공하고 영양사 자격증을 땄다. 다시 스포츠 의학과로 편입했다. 제 몸을 잘 알아야 관리를 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신경과 근골격계 질환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우리 몸의 통증 원인과 재활 치료를 위한 자가운동법 등 다양한 공부를 했다. 결혼 후 식단 관리와 운동요법을 접목해 다이어트 샵을 운영한다. 우리 집에 오면 아로마 8단계 오일 마사지를 해준다. 각도가 차이나는 등은 더 순환이 안 된다. 엄마 손은 약손이라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짠하다. 아픔을 이겨내고 항상 당당하게 열심히 사는 딸이 대견하다. 셋째 딸의 가슴 깊이 간직된 아픔을 헤아린 뒤 그때 조용히 넘어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 있었다며 마음 속 화를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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