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가족 / 황정혜
여수에 있는데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린다. "너희 엄마가 이상해." 하는 아버님부터 시동생들, 나중에는 동영상까지 보내왔다. 영상 속 어머님은 대성통곡했다. 어린 시절 고생했던 이야기, 아버님이 힘들게 했던 일을 쏟아내며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버님은 온몸으로 주먹세례를 받았다. 시동생들과 시누이는 죄인 취급을 당하며 욕을 먹는 상황이었다. 10시간 정도 쉬지 않고 했기에 눈은 퉁퉁 부어 있고 목소리는 다 쉬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니 웃었다. 울었다를 반복하며 감정의 기복이 심해 종잡을 수가 없었다. 평소 어머님 모습이 아니었다.
어머님은 수십 년 당뇨를 앓고 허리 수술, 심장판막 수술, 높은 칼륨 수치로 의식을 잃기도 했으며 중환자실 입원도 잦았다. 초기치매가 있는데 아버님에게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갑작스레 중중치매 증세로 나타났다. 약을 바꿔도 소용이 없었다. 대소변 조절을 잘못하고 밤새 아버님을 때리며 계속 중얼거리며 욕을 했다. 옷과 이불은 다 빼서 내던지고 수면제를 먹여도 잠을 자지 않았다. 빨간치마, 노랑저고리 입은 여자가 왔다갔다 한다며 저리가라 손사래를 치면서 커텐 속 장롱 속으로 숨었다. 같이 사는 아버님마저 위급한 상황이었다.
막내 시동생이 치매교육을 몇 번 받았는데 중증치매에 맞는 약을 찾는 게 시급하단다. 요양병원을 찾아가서 의사와 상담도 했다. 두 달 동안 입원해서 24시간 의사와 간호사가 관찰한 결과물로 치매등급이 정해지고 약이 결정된다고 했다. 평상시에 "난 요양병원 안 간다. 절대 보내지 말아달라." 입버릇처럼 말했다. 혼자 남을 아흔 한 살의 아버님 또한 식음을 전폐하리란 것은 불 보듯 뻔 한 일이었다. 코로나 시국에 면회도 안 되는 상황이라 걱정이 컸다.
인터넷 검색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신 경험이 있는 사위들에게 물었다. 치매약은 그렇게 종류가 다양하지 않으며 한 번 들어가면 쉽게 나올 수가 없다고 했다. 잠자고 있는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아무 것도 해보지 않고 요양병원에 보내는 것은 큰 불효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노력해보고 안 되면 그 때 보내기로 해요. 당신이 형제들을 잘 설득해 보세요." 동생들과 나이차가 많아 엄마의 고생스러웠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크게 공감해 주었다. 돌아가면서 아버님 집에서 자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날의 일을 가족 카톡방에 공유했다. 우리와 함께한 날은 예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잠도 잘 자고 아침밥을 드신 후 운동까지 했다. 말도 정상적이라 동생들이 무어라 설명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동생들이 자는 날은 달랐다. 집이 난장판이 되고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어머님 가슴 속에 큰아들은 그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었다. 아버님 때문에 힘들어할 때마다 "엄마 날 보고 살아달라."고 매달렸단다. 심장판막 수술을 받고 서울에서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동안 새벽차로 올라가 면회하고 내려오기를 오랫동안 반복했다. "우리 ㅇㅇ이가 날 살렸다. 큰 아들이 오기만 얼마나 가슴 졸이며 기다린 줄 아느냐." 하며 눈물이 고였다. 치매에 좋은 오일을 만들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사지를 해 드린다. 아로마 오일을 넣어 족욕도 시켰다. 뇌를 활성화 시킨다고 했다. 우리집에서 살겠다고 옷, 이불, 베게까지 몇 보따리 싸서 막내 시동생이 모시고 왔다. 당뇨 수치에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아버님과 다툰 모양이다. 며칠 지나자 밤 12시가 넘었는데 내일 학교 가야 하니까 데려다 주라고 했다. 카리따스 재가노인 복지센터를 학교라고 한다. 증세가 심해지면서 치료에 도움이 될까 해서 보내게 되었다. 잠깐 잠든 사이 어머님이 없어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아버님께 전화해 보니 귀가 어두워 벨소리를 못 들어 문을 못 열어 주었단다. 다행히 아파트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추운데 옷도 제대로 안 입고 집에 간다고 나선 것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했다. 어머님의 행동은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우리 앞에서는 정상인데 동생들에겐 달랐다. 빨리 맞는 약을 찾아야 한다며 더 위급한 상황이 되면 어렵다고 형이 결정을 내리길 바랬다. 누가 요양병원 보내고 싶겠냐며 어머님을 위한 일이라고 언성을 높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너무나도 막막했다. "엄마가 성묘를 가고 싶다고 하니 갔다와서 결정하자."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간다고 하니 좋아하시며 떡, 전, 나물 세 가지, 과일 등 준비할 것을 내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가게에도 차려 놓으라고 했다. 어머님은 한없이 절을 했다. 모두가 같은 심정으로 기도했으리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데 어제보다 훨씬 더 얌전해지고 좋아보인다는 아버님 말에 위안을 삼는다. 약이 맞았는지 자식들 정성인지 한달 반 만에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더 이상 요양병원 얘기는 없다. 가족 카톡방도 정상이다. "3월 31일 어머니 삼성병원 예약입니다. 형님이 모시고 가면 됩니다." 어려울 때 큰 힘이 되어 주는 가족이 있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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