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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글방

예순 살로 산다는 것

by 嘉 山 2022. 3. 23.

예순 살로 산다는 것 /황정혜


"ㅇㅇ 엄마! 예순 살이 되면 얼마나 좋은지 몰라. 얘들도 제 자리 잡아 가고 몸도 편해지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거든." 내가 사는 게 힘들어 보였는지 단골손님인 ㅇㅇ 엄마가 말했다.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뀔 때마다 삶의 시작이라 생각했다. 가슴속에 열정과 삶의 의지를 다잡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10년 뒤의 내 모습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늘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날들이었다.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예순 살이 기다려졌다.


세배를 마치고 온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님이 말했다. "내가 둘째하고 셋째 때문에 산다. 둘째는 반찬을 만들어다 주고 셋째는 현미 누룽지를 상자째 사다 주니 말이다." 시부모님은 슬하에 자식이 다섯 명이다. 나름대로 효자 아닌 사람이 없다. 어른들은 아버님 같은 복만 타고 났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며 칭찬이 자자하다. 나는 살짝 서운했지만 그날은 무심하게 넘겼다.


며칠 뒤 아버님은 기운이 없다 하시며 영양제를 맞으셨다. 기운 없으면 날마다 육회를 드시니까 시누이에게 전화를 했나 보다. 그런데 몇 사람을 거쳐 내게 전달되었다. 평상시에도 칼륨을 제한하는 식사를 하시기에 고기를 찾는다. 꼭 시누이를 통해서 듣게 된다. 언젠가 남편에게 "아버님, 어머님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직접 전화하면 될 텐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말했더니 편해서 그러니 놔두라고 했다. 이번엔 정말 화가 났다. 우리 몫으로 시부모님께 들어가는 돈이 한 달이면 동생들보다 서너 배가 넘는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명절 때 아버님 말씀 들었지요. 이제는 내게 직접 전화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내지 않겠어요." 알아서 하라며 내게 독하다고 했다. 40여 년을 시집 와서 큰며느리 노릇하느라 나름 애썼는데 꼭 제삼자를 통해야만 하는 것일까? 남들은 며느리가 "어려워서, 미안해서"라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너무너무 서운했다. 그렇게 뾰족뾰족한 돌맹이를 가슴에 안고 내 예순 살은 시작되었다.


공자가 말한 "이순"은 "귀가 순해진다."는 말이다. 이것은 남이 서운한 소리를 해도 감성으로서 순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리라. 한 달 동안 가슴 속의 뾰족한 돌맹이를 굴리고 또 굴렸다. 내가 노력하지 않고는 공자가 말한 예순 살은 결코 "이순"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자의 예순 살은 유랑의 고난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고 한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절망의 골은 깊었다. 이러한 고난의 시기에 "이순"의 달관을 얘기했던 것이다. 고난 속에서 넓어지고 깊어지고 용서의 마음이 생겨났던 것이리라.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한 선원은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남긴 말이다. 그는 잔인하게 덧붙인다.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깊은 고독 속에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서 되돌아보는 시간과 마주할 때 우리는 자신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육체는 쇠약해지고 귀는 더욱 예민해지려 하는 예순 살의 나는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 수없는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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