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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글방

나끌려왔음

by 嘉 山 2022. 3. 23.

나끌려왔음/황정혜

새벽 530, 일출 보러 가자고 남편이 깨운다. 바깥은 살벌한 바람소리와 함께 덜컹거리는 소리 요란하다. 이불 속으로 더 들어가며 "나 가기 싫어." "가자." 남편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듬뿍 배어있다. 내 게으름도 더는 버틸 수가 없다. 한 번 맘 먹으면 꼭 하고야마는 열정적이고 부지런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해 일출을 보러 가는 것은 언제부터인지 당연한 일이 되었다. 같이 가 주어야 올 한 해도 수월하지. 속으로 생각하며 주섬주섬 챙겼다. 다음엔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는 이팔청춘 아들을 깨운다. "안 가면 안 돼요?" 짜증 섞인 목소리다. 꼭 같이 행동하기로 약속했다는 아빠의 말이 아들 기억엔 없다. 둘이 실랑이를 벌인다. 그냥 우리 둘만 가자 해도 그 집요함은 대단하다. 아들은 잔소리를 한바가지 얻어먹고 마지못해 따라 나선다.

 

 

그날 따라 유달산자락의 바람은 소백산 칼바람보다 더 세차게 얼굴을 후려쳤다. 그리고 가끔 눈까지 뿌려댄다. 깜깜한데다가 바위는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일출 한 번 안 본다고 지구가 멸망할 일도 아닌데 그 난리를 피운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일등바위를 향해 오르는 사람들 틈에서 밀리듯이 걸음을 옮겼다. 정상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 기다리던 일출은 보지 못했다. 아들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올라오면서 친구들을 몇 명 보았는데 "나 끌려왔음."하고 얼굴에 쓰여 있더라는 것이다. 침묵을 깬 그 한마디에 우리는 얼마나 웃었는지 일출을 보러 갈 때마다 생각난다.

 

 

남편은 아이들과 함께하려 노력했다. 딸들은 좋아하며 잘 따라다녔다. 사춘기를 심하게 겪는 아들은 언제나 짜증을 부려 끌려다니다시피 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태백산 무박산행을 떠났다. 이틀전부터 태백산에 많은 눈이 내렸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맑은공기와 쏟아질 듯 수많은 별빛을 친구삼아 부지런히 걸었다. 일출을 보리라는 욕심이었으나 시야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하늘 호수 같았다. 유일사에서 천제단 올라가는 중간쯤부터 형성된 주목 군락지는 신이 우리에게 주신 최상의 선물이었다. 코 씩씩 불며 오만 인상 다 쓰고 땅만 쳐다보던 아들이 고개를 들었다. 주목나무 가지가지마다 햇살이 내리쪼여 환상적인 눈꽃을 연출했다.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이리라. 아들은 태백산의 눈꽃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가끔 얘기한다.

 

 

3대가 함께한 금강산 관광도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더 애틋한 정을 느끼게 했다. 두 시간만 걸으면 더 이상 못 걷겠다고 혼자라도 내려가겠다고 떼쓰던 지리산, 가끔씩 끌려다녔던 백두대간 종주길도 추억으로 간직되리라. 아빠가 사람 되라고 가르치던 명심보감도 꾸벅꾸벅 졸면서 들었지만 누나들이랑 먼훗날 얘깃거리가 되리라 생각한다. "아름다운 것을 많이 보고 좋은 것을 경험해보아야 한다. 그래야 더 열심히 노력해서 잘 살게 될 것." 이라며 아이들을 격려하곤 했다. 이제는 아이들이 다 커서 일출을 보러 가자는 말도 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재야의 종소리를 듣고 해돋이까지 본단다.

 

 

우리 부부는 올해는 돌산에 있는 무술목 해변을 갔다. 파도가 몽돌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푸른바다를 바라본다. "처얼썩 철썩, 자글자글 촤르르르." 그 소리가 경쾌하다. 수평선 위로 용솟음치는 장엄한 태양은 바다에 거대한 불기둥을 만들었다. 황금빛 찬란함이 하늘을 물들이고 싱싱한 활력으로 일렁이는 파도소리는 새해의 시작을 알렸다. 내 몸에 흐르는 피는 짜릿함으로 전율한다. 새해 새 아침을 가슴에 안고 아들이 아빠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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