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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글방

여 름 휴 가

by 嘉 山 2020. 9. 29.

여름휴가 

작은 미소로

몇 년 동안 우리 가족 여름휴가지는 지리산 의신계곡이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손주들까지 4대가 함께하는 의미있는 여름휴가였다.

첩첩산중 깊은 계곡에 들어서면 쉴 새 없이 흐르는 물소리가 청아하다.

몸을 시원한 계곡물에 담그고 구름과 안개가 이루어내는 색다른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영혼의 찌든 때까지 말끔히 씻어 주는 듯하다.

가슴 속 열이 많은 어머님은 우리 덕분에 삼복더위를 잘 이겨낼 수 있다며 고마워하셨다. 일곱살 외손자는 입술이 파래지고 턱을 덜덜 떨면서도 물 속에서 나오지를 않는다.

오롯이 즐긴 하루였다.

"인제 그만 돌아갈 시간이다"

남편의 말에 손자는 이 물을 두고 가기엔 너무나 아깝다며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쓴다.

내년에 또 오기로 하고 겨우 달래서 왔다.

하지만 올해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어느 날,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코로나19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도 유치원도 못 가고 아파트에 갇혀 있으니 힘들어 한단다.

그래서 흙을 밟게 해주고 싶은데 엄마 집에 가면 안 되겠냐고 묻는다.

흔쾌히 허락했다. 손주들을 볼 생각을 하니 기쁘기 한량 없었다.

전화를 끊고 단숨에 마트로 달려가서 시원한 수박 한 통 품에 안았다. 왼손, 오른손, 양팔, 천근만근 짓눌러오는 수박의 무게, 결국 수박을 굴리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신호등도 지나고 옷가게도 지났다.

잘 굴리고 싶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진관 사진 속 사람들이 일제히 쳐다보며 깔깔깔 웃는다.

풀숲에 처박히고 벽에 부딪히고 돌부리에 찍히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집에 다다르니 수박은 상처투성이다.

벌어진 붉은 입술 사이로 검은 이빨 우수수 쏟는다.

씨를 모아 손자랑 꽃밭에 심기로 했다.

호미로 땅을 군데군데 파서 수박 씨를 넣고 조심스럽게 흙을 덮어 주었다.

상추와 쑥갓, 깻잎 모종도 사다가 심었다.

드디어 수박 싹이 돋았다.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좋아했다.

아침, 저녁으로 서로 물을 주겠다며 경쟁했다.

수박 줄기는 무럭무럭 자라 꽃밭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뻗어 나갔다.

오직 물 주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아이들을 보며 난 걱정거리가 생겼다.

그렇게 꽃도 많이 피고 잎이 무성한데 수박이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눈 뜨면 아이들 몰래 수박이 열렸는지 확인하는 게 나의 일과가 되어버렸다.

왜 수박이 안 열리는지 동서에게 물었더니 모종을 사다가 심어야지 먹던 수박씨를 심으면 잘 열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할머니, 배고파요. " 하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앙징스럽게 먹는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할머니들이 가게에 오셔서 "손주들 입에 맛난 것 들어갈 때가 제일 행복하다." 는 말이 크게 공감이 되었다.

수저 놓자마자 집 앞 골목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공놀이, 줄넘기, 훌라후프, 물놀이 등 신나게 뛰어 놀았다.

특히 비눗방울 놀이는 기구가 크기와 모양이 다양해서 왕비눗방울부터 아기 비눗방울까지 햇빛이 반사되어 무지개빛 영롱하다.

물총은 우리 아이들 키우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마음껏 여름휴가를 즐기던 손주들은 한 달 정도 머물다 돌아갔다.

딸이 말했다. "나는 엄마처럼 할 수 없을 거에요. 고마워요."

"든 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 는 말처럼 집이 썰렁하다

아이들 생각을 하면서 무심코 꽃밭을 둘러 보았다.

세상에! 치자나무에 메달려있는 손자 주먹만한 수박을 발견했다.

정말 다행이었다. 사진을 찍어 얼른 보내서 알렸다.

수박을 보러온 아이들은 무척 좋아했다.

여름날의 손주들과 한 약속을 생각하며 아침 저녁으로 정성껏 물을 주었다.

태풍에 떨어지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기도 했다. 서늘한 바람이 분다.

말라가는 수박 줄기에 메달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미처 다 자라지 못한 수박을 바라본다. 크고 맛있는 수박은 얻지 못했어도 손주들과 함께했던 시간을 생각하며 웃는다..

코로나19로 난 큰 행복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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