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 가면 쌓여있지
작은 미소로
나는 범띠 아줌마다.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날이 어둑어둑 해 질 무렵 태어났단다.
호랑이가 먹잇감을 찾아 나서는 시간대란다. 눈을 번득이며 기운차게 움직였으리라 생각된다.
나름 좋은 시를 타고났다고 자부하는데 어릴 적 내 별명은 무량 태수였다.
욕심도 없고 근심 걱정도 안 하며 동작이 느려서 그렇게 불리었다.
욕심도 많고 똑 부러지며 해결 못 하는 일이 없는 남편과 28년째 장사를 한다.
"항상 열심히 온 힘을 다하며 살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내가 하는 일은 몸을 수고롭게 하는 일이다.
'고단한 육체노동을 하지만 마음만은 수고롭지 말자'는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름대로 장인정신으로 버텨온 세월이다. 먼저 손님께 무슨 요리를 하실건지 여쭙는다. 부위별로 선택해서 세심한 손질과 정성스런 칼질까지 심혈을 기울인다.
손님이 맛있게 요리해서 드실 수 있는데까지 내 책임이라 생각한다.
장사가 잘 되는 비결은 남편이 좋은 물건을 구매하는 안목이 첫째다.
둘째는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니 많은 분들의 믿음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내 삶의 중심에는 '신뢰'라는 두 글자가 마음에 있다.
손님들이 오시면 많이 기다려야 되는 상황이 있다.
못 기다리고 재촉하는 사람은 포기한다.
마음을 급하게 먹는 순간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리고 손님들이 끼어들기를 용납하지 못한다.
예전엔 양보도 많이 했는데 요즘엔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우리 가게는 택배주문도 많다. 남편은 항상 돈을 먼저 받고 물건을 보내라고 한다.
하지만 난 물건 받으신 후 확인하고 송금하시라고 한다.
사람을 믿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이것저것 급하게 주문했다.
광주까지 고기를 부쳐달라는 데 시간이 촉박했다.
아침에 일도 많고 그렇게 재촉하자 정말 하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다.
그런데 자기 숙부님이 많이 편찮으신데 우리 가게에서 파는 고기를 좋아하시니 꼭 선물을 하고 싶단다.
우리 가게를 어떻게 알고 전화 했는지 물었다.
남편이랑 함께 온 적도 있으며 잘 안다고 했다. 꼭 부탁한다고 했다.
정신을 쏙 빼놓고 급하게 퀵 서비스를 연결했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무슨 행사를 치르는데 끝나면 돈을 주겠다고 많이도 주문했다. 불안하지만 믿고 싶었다.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차일피일 미뤄지는 송금날짜와 핑곗거리, 울산에 있는 본가에 초상이 났다며 화환까지 찍어서 보냈다.
어이가 없다. 급기야 전화번호까지 바꿨다.
난 애들에게 돈이 없으면 먹을 것 입을 것 다 참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돈이 없으면 안 먹어야지. 남편에게 말했다.
그냥 액땜했다고 생각하자 저승 가면 다 쌓여있겠지 아니면 전생에 빚진 게 있다든지.
남편은 목포 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했다.
광주 광산경찰서로 넘어가고 그 다음 법원으로 넘어갔다.
서신과 문자가 왔다. 재판날짜에 방청할 수 있다고 했다. 잘못은 꼭 처벌을 받아야 한다. 확고한 주장이었다.
다음엔 꼭 돈 받고 물건을 보내라고 하는데 잘 고쳐지지 않는다.
천성은 잘 변하지 않나 보다.
나는 남편에게 무신경한 사람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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