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ㅇ의 영정사진 / 황정혜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무렵 친구가 전화를 했다. " 보고 싶다. 우리 모임을 만들자." 일 년에 한 번 만이라도 만났으면 좋겠다. 멀리 떨어져 살고 소식이 뜸하더라도 어릴 적 친구는 늘 따뜻한 마음과 그리움의 대상이다. 결혼한 후로 각자의 삶에 충실 하느라 얼굴 본 지가 오래 되었다. 모두 동의했다. 남편과 어린 아이들도 함께 하기로 했다.
첫 만남의 장소는 우리 집이었다. 광주 사는 친구는 작은 고추가 맵다고 어려서부터 박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솜씨 만점 살림꾼에 해결 못하는 게 없다. 유머가 넘치고 웃음소리만 들어도 즐거움이 전염 되었다. 광양 사는 친구는 자매가 여섯인데 다섯째 딸이라 집안 살림은 물론 부모님 도와서 농사일도 많이 했었다. 여전히 부지런해서 주위 사람들을 아우르며 고운 마음으로 항상 웃는 얼굴이다. 친구들 눈에도 제일 잘 사는 것처럼 보였다. 강진 사는 친구는 별명이 천사다. 착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예쁘다. 신앙심도 깊다. 여수 사는 친구는 어릴 적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선한 이미지였다.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소꿉놀이 하던 시절 얘기를 하며 동심으로 돌아갔다. 시험공부 하면서 친구의 졸음 온 눈에 물파스를 발라서 혼났던 일을 말할 때는 정말 미안했다. 항아리 속의 묵은 장맛처럼 공감되는 추억을 얘기하며 시간을 넘나드는 행복을 느꼈다. 또래의 아이들도 다락방을 오르내리며 재미있게 놀았다. 오랫동안 다락방 얘기를 했단다.
친구들이 사는 집을 차례대로 한 바퀴 돌았다. 다음부터는 간단하게 도시락을 싸서 등산을 가기로 했다. 유달산, 무등산, 백운산, 천관산, 영취산 등 근교의 산에서 만났다. 케케묵은 얘기를 나누어도 낡은 일기장에 얹힌 세월의 향기처럼 느껴졌다. 만나는 시간은 소녀시절로 되돌아가 실컷 웃었다. 남편들도 아내의 날이라고 특별히 배려해 주었다 모임 20주년 기념으로 장가게로 여행을 갔다. 아기자기한 우리나라 산세와는 또 다른 웅장함이 있었다. 우뚝 솟은 수많은 봉우리는 신비스러웠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웃고 즐기며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10년 뒤에 국외여행을 또 가기로 약속했다.
나이 들어 갈수록 고향이 그리웠다. 이제부터는 돌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돌산 종주 길과 돌산 갯가 길도 걸었다. 흙내음, 갯내음에 가슴 뭉클한 감동이 몰려왔다. 많이 변했지만 고향의 품 속은 아늑했다. 오동도 동백숲을 거닐며 떨어진 꽃을 주워서 하트모양을 만들었다. 친구들아 사랑한다. 사진도 찍으며 마냥 행복했다.
광양 사는 친구가 나잇살이 찌는지 자꾸 배가 나온다고 했다. 결혼하기 전이나 몸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등산도 일주일에 두세 번 가고 국외여행도 자주 하고 걱정 없이 사는 건강한 친구였다. 다음 해 만났더니 빙글빙글 도는 듯 많이 어지럽다고 말했다. 달팽이관의 이상인지 모르니 병원을 가보라고 했다. 진단결과 난소암 4기라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항상 웃으며 긍정적이고 쾌활한 친구이기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수술이 잘 되었다는 친구 남편의 말에 안도했다. 항암치료도 잘 견디어내고 덤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이라며 다 내려놓고 감사만이 살 길이라고 늘 강조했다. 수술한지 1년이 된 날에는 축하케이크로 건강을 기원하며 잘 이겨내 주어서 고맙다고 우리는 말했다.
안부전화에 "괜찮아! 금방 좋아질 거야."라고 친구는 늘 말했다. 혀가 쩍쩍 갈라지고 입술이 타들어 가니 도저히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며 너무나 힘들다고 하던 친구는 작년 겨울 세상의 짧은 여행을 끝내고 하늘나라로 갔다. 화사하게 피어난 연보랏빛 꽃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친구의 영정사진은 왠지 모를 향기가 났다. 나보다는 항상 남을 먼저 배려했고 명랑한 성격에 열정적인 삶이었다. 우리 마음속에 사랑을 심어주고 떠난 친구의 영정사진은 내 가슴 속에 소중히 자리매김 했다. 친구를 떠나보내고 28년 소꿉친구들의 모임도 의욕을 잃었다. 모두 말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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