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의 원인과 배경
1960년에 결성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북베트남의 지원 아래 남베트남 정부와 이들을 지원한 미국과 벌인 전쟁이다.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벌인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6〜1954)과 구분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하며, ‘월남전(越南戰)’이라고도 한다. 남베트남 정부가 붕괴된 1975년 4월 30일까지 지속되었다. 초기에는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사이의 내전(內戰)이라는 성격을 띠었으나, 1964년 8월 7일 미국이 통킹 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을 폭격한 뒤에 전쟁은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 하에서 한국, 타이,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중국 등이 참전한 국제적인 전쟁으로 비화되었으며, 미국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으로 군사개입의 범위를 넓히면서 전장도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전쟁 중에 미국, 한국군에 의해 미라이 학살, 빈호아 학살, 퐁니 퐁넛 양민 학살 등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베트남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7년에는 베트남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자 호찌민[胡志明]을 중심으로 1941년 5월 19일 베트민(Viet Minh, 베트남독립동맹)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뒤에 베트민은 하노이를 점령하고 그해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립과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1946년 11월 23일 하이퐁(Haiphong) 항구에 함포 사격을 가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은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비엔푸(Dien Bien Phu)가 함락될 때까지 9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해 7월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이 성립되어, 북위 17°선을 경계로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제네바협정에서는 1956년 국제감시위원회의 감독 아래 베트남 전역에 걸쳐 자유선거를 실시하도록 규정했으나 1955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베트남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은 선거 실시를 거부했다. 그리고 농민들이 베트민의 토지개혁으로 분배받은 농지를 다시 회수하고, 친 가톨릭 정책을 펼쳐 민중의 반발을 샀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는데, 초기에 카오다이(Cao Dai)나 호아하오(Hoa Hao) 등의 종교집단을 중심으로 시작된 봉기에 베트민의 구성원들이 합세하면서 1950년대 중반에는 이른바 ‘베트콩(Viet Cong)’이라고 불리는 게릴라 군사조직으로 발전했다. 지엠 정권은 1958년 반공법을 시행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으로 반발을 억누르려 했으나, 남베트남의 반란 세력은 1960년 12월 20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해 정부군과 본격적으로 맞섰다. 이들은 민족민주정부의 수립, 토지개혁, 평화통일, 중립외교 등 10개 항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지엠 정권에 대한 반발이 확대되자 1963년 즈엉반민(Dưong Van Minh) 등은 미국의 방조 아래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1964년 응우옌칸(Nguyen Khanh)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남베트남 정권은 잇따른 쿠데타로 크게 불안정해졌다. 이렇듯 남베트남의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의 존슨(Lyndon Baines Johnson) 정부는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의 숫자를 늘렸다. 그리고 미국의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이른바 ‘통킹 만 사건’을 구실로 1964년 8월 7일 북베트남에 폭격을 가해 전쟁을 북베트남과의 전면전으로 확대했다. 미국은 그 뒤 1968년까지 북베트남에 약 1백만 톤에 이르는 폭탄을 퍼부었으며, 약 55만 명에 이르는 지상군을 파병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 등에 파병을 요청해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등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1968년 1월 30일 음력 설날을 이용한 구정대공세를 펼쳐 주요 도시들에서 미국과 동맹국들의 주요 시설을 점령했다. 그리고 그 성과를 배경으로 1969년 6월 8일에는 남베트남공화국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했다.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군은 곧바로 빼앗겼던 도시와 시설들을 탈환했지만, 이 사건은 미국의 여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쟁의 승리를 낙관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에서는 반전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존슨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하고 군사개입의 중단을 내세운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닉슨은 1969년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을 새로운 안보ㆍ외교 전략으로 내세우며 미군의 철수 계획을 발표하였다.
구정대공세 이후인 1968년 5월부터 미국과 북베트남의 정전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1972년까지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1970년 이후에는 미국이 캄보디아의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전장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972년 4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각지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자, 미국은 북베트남의 모든 항만에 기뢰를 부설하고, 하노이와 하이퐁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는 등 북베트남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2년 여름부터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정전 협상이 비밀리에 재개되었고, 마침내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파리평화협정은 남북의 휴전과 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구성, 60일 안에 모든 미군의 철수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평화협정을 체결한 뒤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북베트남과 미군 사이에 포로 교환도 이루어졌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규모를 크게 줄였고, 오일쇼크로 촉발된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1974년 1월부터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간의 갈등은 다시 무력충돌로 확대되었다. 결국 북베트남은 1975년 대규모 공세를 벌여 그해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점령했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던 즈엉반민의 항복을 받았다. 사이공이 점령된 뒤 남베트남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76년 7월 2일 남북 베트남이 통합해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을 수립하면서 베트남은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었다.
한편,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이다. 한국은 1964년 9월 의료진을 중심으로 한 비전투요원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30만 명이 넘는 전투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그 과정에서 1만6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많은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 피해 등의 후유증에 시달렸다. 1999년에는 1만6천여 명의 고엽제 피해자들이 고엽제 제조사들인 미국의 다우케미칼과 몬산토 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참조항목
국군파월, 닉슨독트린, 베트남평화회담, 제네바극동평화회의
역참조항목
가위바위보, 간섭전쟁, 고엽제, 공습, 교전, 내전, 닉슨-티우회담
[네이버 지식백과] 베트남전쟁 [Vietnam War] (두산백과)
- 만들어진 "통킹 만"의 사건
1965년, 하이난섬 및 베트남 북부해안으로 둘러싸인 남중국해의 만에서 미군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 미국은 이를 비난, 그 다음날도 공격을 받은것에 대해 존슨은 보복을 명령, 항공 모함에서 이륙 한 폭격기가 북베트남 령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통킹 만에 있던 구축함은 사실 북베트남 영해를 침범했고, 게다가 남 베트남의 군함과 함께 북의 행동을 감시하는 비밀 행동에 임하고 있었다. 북쪽도 물론 국제 무대에서 미국의 행동을 비난했지만, 세계는 북 베트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미국은 전쟁을 하고 싶었다? 미국 진영과 소련 진영의 대립....
이 전쟁은 미국을 맹주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맹주로 하는 공산주의 진영과의 갈등(냉전)을 배경으로 한 "대리 전쟁"이었다.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북 베트남)측은 남 베트남을 미국의 괴뢰 국가라고 규정하고, 베트남인에 의한 베트남 통일 국가의 건국을 요구하는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식민지 해방 전쟁이라고 했다.
어쨌든 베트남에서 전쟁을 하고 싶었던 미국...
프랑스의 배후에 있던 자본주의 권의 맹주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통일된다면 이웃 나라에 혁명의 물결이 번져가는 것이 아닌가하고 두려워했다. 이른바 "도미노 이론"...
54년 제네바 조약에서 베트남은 북위 17도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는데 "남쪽"은 미국의 괴뢰 정권이 수립된다. 그리고, 협약에는 2년 이내에 재 통일이 된다는 것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북"이 "남"의 반정부 세력(60년에 남 베트남 해방 민족 전선으로 통일함)을 부당하게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6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쪽"의 정부군을 지원하기로 칭하고 "특수 전쟁" 시작.
1960년 12월에 시작하여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까지 15년 동안 이어진 긴 전쟁이었다.
(출처) D : 2017.10.19 11:37 : 밀리터리
베트남 전쟁 참전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
1960년대를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 보면 후반 (1965-69년)의 연평균성장률은 11.8%로서 1960년대전반 (1960-64년)의 실질성장률은 5.5%의 두배를 넘는다. 한국경제의 기적은 1960년대부터가 아니라 1960년대후반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초기 발전전략은 성공하지 못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년)은 장면 정권의 계획을 답습한 것이었는데, 기간산업의 수입대체와 1차산품의 수출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발전전략은 인플레이션과 외환부족으로 곧 위기에 부딪쳤고, 한국경제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개입에 기초한 한일국교 재개와 베트남 특수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비로소 도약단계로 들어갔다.
한국경제 발전에 대한 시장주의적 해석은, 박정희 대통령의 초기 수입대체 발전전략의 실패와 미국의 개입(이른바 AID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통한 이른바 가격의 왜곡의 정정 측면을 중시한다. 즉 1964-66년에 걸친 평가절하, 수출지원제도, 수입자유화 등의 자유주의적 경제개혁에 의해서 국내가격이 상대적으로 왜곡되지 않게 되었으며, 수출 유인이 수입 유인과 동일해졌다는 의미에서 중립적 무역체제가 성립했다는 것이다. 반면 기존의 국가주의적 해석은 초기 발전전략의 실패와 미국의 개입을 통한 발전전략의 변화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국가주의적 해석과는 달리 박정희 대통령의 초기 발전전략이 실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초기의 발전전략의 결함이, 시장주의적 해석이 주장하듯이, 이른바 가격의 왜곡을 정정하는 평가절하와 같은 시장개혁을 통해 극복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고도성장의 시동은 영구군비경제의 효과(=베트남 특수)에서 주어졌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1965년 2월 의료반 등 비전투부대 파병으로 시작되어, 그 수는 연간 약 5만명이었으며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연 31만여명에 달했다. 한국과 미국은 1966년 이동원 외무장관과 브라운 미국대사 간에 각서를 교환하는 것에 의해, 한국군 전투부대 파병조건에 관한 수개월에 걸친 교섭에 종지부를 찍었다. 유명한 ‘브라운 각서가 그것이다.
’브라운 각서‘에 따라 한국은 전투부대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군사원조 이외에,
(1) 주월 병력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원‘화로 한국 측 예산에 방출하고
(2) 주한미군용 물자의 상당분을 한국에서 조달하며,
(3) 주월한국군 소요 물자와 베트남군 소요물자 중 일정 품목도 한국에서 구매하며,
(4) 베트남 건설사업에 한국 건설업체에게 응찰자격을 부여하는 것 등,
대한(對韓)구매 조치를 크게 확대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한국에 대해 베트남은 전장일 뿐만 아니라 거대한 시장이었다.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에 수반된 군사비의 확대는 이른바 베트남 특수를 발생시키고 한국경제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외환보유고의 증대, 이것을 계기로 한 급속한 공업화가 그것이다. 한국은 베트남 참전국으로서 파병군인의 송금, 미군의 물자 조달 등을 중심으로 연간 2억달러의 특수를 확보했으며 1965년부터 1972년까지 10억 2,200만달러에 달하는 특수를 얻었다. 한국에서 베트남 특수의 중심은 물자조달 내지 상품수출보다도 오히려 무역외수입이었다.
한국의 대베트남 수출총액은 물품 군납의 증가에 힘입어 매년 증가 경향을 보였다. 즉 1965년 1,770만달러로부터 1970년 7,000만달러로 증가했다. 그 결과 베트남은 미국, 일본에 이어 제3위의 수출시장으로 되었다. 한국 수출총액에서 차지하는 베트남의 수출비중은 1965년 10.1%, 1966년 9.5%, 1967년 7.2%, 1968년 8.3%, 1969년 7.6%, 1970년 8.4%였으며 연평균 8.5%였다.
한국의 베트남 특수를 분야별로 보면 ;
(1) 장병, 기술자의 송금이 3억 6770만달러 (특수총액의 36.0%),
(2) 건설 용역의 군납이 2억 8650만달러 (28.0%),
(3) 수출 (물품 군납 포함)이 2억 8310만달러 (27.7%),
(4) 기타 8,470만달러 (8.3%)로 이루어져 있다.
장병 기술자의 송금이 전체의 36%를 점하여 가장 많다. 당시 베트남은 한국에 대해 온갖 잔학한 살륙이 자행되었던 아비규환의 전쟁터였을 뿐만 아니라 서부 개척시대와 같은 개척지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전투수당은 미군의 1/6, 필리핀군, 태국군의 1/5에 불과했고 한국군의 대부분을 점한 병사 즉 상병, 일병, 이병 등의 경우는 같은 계급 베트남군 병사의 급료보다 낮고 참전 각국 장병 중에서 최저액이었다.
한국은 베트남 참전국으로서 파견자의 송금, 미군의 물자조달 등을 중심으로 1965년부터 1972년까지 10억달러의 특수를 입수했다. 이러한 베트남 특수는 매년 증대하여 특수가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5년 0.6%에 불과했지만, 1967년 3.5%, 1968년 3.2%, 1969년 3.0%에 달했고, 한국경제성장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베트남 특수가 한국경제에 미친 영향은 한국전쟁 특수가 일본경제에 미친 영향과 거의 대등했다. (한국특수는 당시 일본의 GNP의 3.8%에 달했다.) 베트남 특수가 장기간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한국경제에 베트남 특수가 미친 영향은 한국전쟁 특수가 일본경제에 미친 영향보다 오히려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1965년부터 1972년 8년간 10억2200만달러에 달해 같은 기간 일본으로부터 외자도입총액 10억 8900만달러와 거의 같은 규모의 금액이었다.
베트남 특수에 의한 외화수입은 경제개발을 위한 투자재원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 자금부족과 심각한 외화부족으로 고민하고 있던 한국경제에 대해 베트남 특수에 의한 외화수입은 단비와 같은 역할을 했다. 1961년말 외환보유고는 2억 500만달러였는데, 1964년말에는 1억 2900만달러로 계속 감소해서 1964년말에는 외환위기설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1965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관련한 특수의 증가에 의해 1965년말에는 1억 3800만달러로 증가하고 1966년에는 2억3600만달러, 1968년에는 3억 8800만달러, 1970년에는 5억 8400만달러로 급증했다. 한국의 베트남 특수의 중심은 상품수출보다 무역외수입에 의한 것이며 특수 총액 10억 2200만달러 중 7억 4000만달러가 무역외수입으로 되어있다. 이 시기 베트남 특수는 무역외수입의 증가를 결과시켰으며 무역외수입의 증가는 다시 외환보유고 증가의 요인으로 되어 수입능력을 대폭 증대시켰다. 한국경제는 1960년대 들어 미국원조의 감소에 따라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거액의 베트남 특수의 유입은 외환보유고 확충에 기여하고 1960년대 후반 고도성장을 시동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일본으로부터의 외자도입 총액 즉 청구권자금 (무상, 유상원조), 상업차관, 직접투자가 총계 10억 8900만달러였던 것에 대해 같은 기간 베트남 특수의 누계액은 10억 2200만달러로 그것에 필적했다.
1960년대 후반 한국의 가장 걸출한 성과는 다름 아닌 수출의 급증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확대와 함께 수출은 눈부시게 증대하여 1964년에는 1억 2000만달러였던 것이 1972년에는 16억 2400만달러로 13.5배 증대했다. 이러한 높은 증가율은 한국정부의 예상을 훨씬 상회하면서 실현되었다.
즉 한국정부의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의하면 같은 기간중 수출의 증가율은 연평균 17%로 1971년의 수출목표는 1965년 수출실적액의 3배에 해당되는 5억 5000만달러로 책정되었지만 실제 동기간 중 수출증가율은 연평균 35.4%로 계획의 2배의 증가율을 기록하여 그 결과 1971년 수출실적은 10억 7000만달러로 정부의 목표액을 2배를 넘었다. 한국경제 발전모형의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들어지는 수출주도형 고도성장은 베트남 전쟁 없이는 시작될 수 없었다.
한국의 수출시장을 무역통계로 보면 한국의 수출총액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1961년 47.4%, 1962년 42.%로 1960년대 초반 40%대였지만, 1965년 이후는 20%대로 감소했다. 그러나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962년 21.9%, 1963년 28.0%, 1963년 28.0%, 1964년 29.5%로 1960년대 초반 20%대였지만, 1965년 이후 매년 증가하여 1968년 및 1969년에는 각각 51.7%, 50.1%로 한국수출의 절반 이상이 미국에 수출되는 것으로 되었다. 즉 1960년대 초반 일본시장의존에서 1965년 이후는 미국시장의존으로 전환했다. 한국의 대미수출의 급속한 증대는 의류, 합판, 전자제품 등 공업제품의 수출증가에 기인한 것이었다.
한국이 수출이 급증했던 1960년대 후반 시기는 바로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확전시킨 시기였다. 미국의 연간 250억달러를 넘는 베트남 관계 군사지출이 급속한 군사수요의 확대를 낳았고, 이것이 한국에 수출시장을 제공했던 것이다. 즉 미국의 수입상황을 보면 베트남전의 확대와 함께 급속하게 신장했다.
1957-64년 8년간 5.6%였던 연평균수입증가율이 베트남전의 확대 이후 1965-72년 8년간 14.8%라는 높은 수준에 달했다. 그 결과 수입액은 1964년 187억달러에서 1972년 556억달러로 약 3배 증가했다.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은 특히 현저해서 1965-72년 연평균 47.5%라는 경이적인 증가율을 보여서 1964년 겨우 3560만달러에 불과했던 것이 1972년에는 7억6000만달러로 21배 증가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은 Buy American정책에 의해 필요한 물자를 미국 본국에서 조달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공동파병국에서 구매한다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1960년대말 국제수지 대책, 달러방위 대책 차원에서 국방비에 의한 구매를 극력 미국 국내에서 행하고 그 해외유출을 극력 억제했다. 즉 미국정부는 대외군사지출에 의한 달러 유출을 억제하기 위해 군사지출 상대국에 대해 미국으로부터 무기 등의 구입을 요구하고 대외군사지출액의 미국으로의 환류를 도모했다. (예컨대 ‘국제수지에 관한 존슨대통령의 메시지’ 1968.1.1.)
그러나 한국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연 31만명에 달하는 군대를 파병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최우선적으로 군수품의 주문을 수주할 수 있었다. 1965년 5월 이루어진 박-존슨 정상회담에서 한국군의 전투부대의 파병이 실질적으로 결정되었는데 미국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한국상품의 수출확대, 대한경제군사원조의 확대를 약속했다. 1965년 5월 18일 발표된 ‘박-존슨 공동성명’은 전부 14개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상품의 대미수출 확대를 약속한 것이다.
의류품의 수출은 1960년대 후반 대개 수출액의 약 60%로 대부분 대미수출이었다. 1960년 이후 한국의 면직물, 의류 등에 대해 수입제한조치를 취했던 미국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의 보답으로 한국에 대해서는 Buy American정책의 적용을 제외했기 때문에 한국에 주문이 쇄도했던 것이다.
요컨대 한국의 수출 증대의 주요 원인은 베트남전의 확대 장기화에 의한 군수의 격증에 있었다. 전자제품의 수출도 1964년 96만달러에 불과했던 것이 1965년에는 180만달러로 배나 증가했다. 또 1966년에는 360만달러, 1967년에는 980만달러, 1968년에는 1900만달러, 1969년에는 4200만달러, 1970년에는 5500만달러로 급증했다. 한국의 대미 전자제품 수출증가는 미국에서 군수의 격증에 의해 군수품의 OEM생산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미국 시장은 반드시 발전도상국 모두에 대해 열려 있는 시장은 아니었다. 이는 이 시기 이른바 Buy American 정책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수출이 급증했던 1960년대 후반에는 연간 250억달러라는 미국의 베트남 관계 군사지출이 베트남 특수라고 불리워지는 군사수요의 확대를 낳았고 이것이 한국에 결정적인 수출시장을 제공했다.
또 한국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 동남아시아 및 아프리카 등의 친미정권 나라들을 중심으로 적극경제외교를 전개하고 수출대상국을 확대했다. 1966년 5월 대한국제경제협의체 (IECOK, International Economic Consultative Organization for Korea)이 세계은행, IMF, 및 미국, 일본, 유럽 각국 등 10개국으로 설립되었다. 이것은 경제협력이 다각화하고 경제외교가 다각화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수입시장 구성에서 보면 미국으로부터 수입비중이 감소하고 일본으로부터 수입비중이 높아졌다. 즉 1960년대 초까지 미국으로부터 수입비중이 50%대로 압도적으로 컸지만, 그 후 점점 감소하여 1970년대로 들어서면 20%대로 감소했다. 반면 일본으로부터 수입이 증가하여 1960년대초는 20%대였던 것이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40%대로 상승한다.
수입상대국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전환한 요인으로서는 수출증가에 따라 수출산업에서 사용하는 원자재와 중간재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수입했기 때문이다. 즉 미국으로부터 발주한 특수 물자의 생산을 위해 섬유공업, 합성수지공업 등 소비재공업의 원자재와 중간재를 수입했던 것이 일본으로부터 수입이 증가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다. 실제로 한국의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은 1965년부터 급증했다.
수입증가에 따라 수입총액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도 1960년대 초는 20%대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 1965년에는 36.0%, 1966년에는 41.0%, 1967년에는 44.5%, 1968년에는 42.7%, 1969년에는 41.3%, 1970년에는 40.3%로 1960년대 후반으로 되면 40%대를 상회하게 되었다. 즉 특수는 한국의 수중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생산력이나 공급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행해졌던 것은 싼 임금으로 가공하는 것이었다. 즉 한국의 베트남 특수는 일본의 원재료와 일본의 기계의 수입증가에 의해 부분적으로 상쇄되었다. 한국의 수입총액에서 수출용제품을 위한 원자재의 비중은 1964년 1.7%에서 1972년 27.3%로 대폭 증가했다. 한국의 대일수입에서 자본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1963-65년 26%였던 것이 1966-69년 43%로 급증했다.
요컨대 한국은 일본에서 자본재, 공업용원재료 등을 수입하여 국내에서 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조립 가공한 소비재를 미국에 수출하는 것으로 고도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즉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미일의 국제분업관계가 형성되고 말하자면 한미일 삼각구조 속에서 한국은 고도성장과 급속한 공업화의 조건을 갖추었던 것이다. 즉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원자재 및 자본재에 국내에서 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조립 가공한 최종제품을 미국시장에 수출한다는 이른바 ‘고도성장의 트라이앵글 구조’가 성립했다.
베트남 특수는 일본-한국-미국으로 이어지는 3각구조의 형성의 계기로 되었다. 즉 한국의 베트남 참전이 그 대가로서 경제군사원조 미국시장에의 진입과 베트남 특수를 불러일으키고 이것이 다시 일본으로부터 대량의 수입을 가능하게 했다.
1960년대 중반 한국경제가 직면했던 외자도입의 곤란을 극복할 수 있게 했던 것 역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수반된 미국으로부터 차관이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따라 미국은 ‘브라운 각서’에 기초하여 차관공여를 약속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한일정상화 압력을 강화하고 유럽에 대해서는 대한경제협력을 호소했다. 실제로 외자도입이 본격화했던 것은 1965년 이후이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방문을 계기로 외자도입은 급속하게 증가했다. 그 내용도 무상원조로부터 개발차관으로 전환했다.
박-존슨 대통령의 1965년 5월 회담에서 개발차관을 약속한 존슨대통령은 거액의 개발차관과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연계시켰다. 존슨대통령이 약속했던 개발차관은 한미관계의 전환점을 이루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계기로 하여 외국자본의 유입은 현저하게 증가했다.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외자도입액(도착 기준)은 누계 40억9000만달러에 달했다.
내역별로는 차관이 30억8000만달러로 75.3%를 차지하여 가장 많았고, 다음이 무상원조가 7억6400만달러로 18.7%, 직접투자가 2억2500만달러로 6%를 점했다. 국별로는 미국이 19억7000만달러로 약 절반을 차지하여 가장 많았다. 일본은 1/4에 불과했다. 즉 외자도입의 약 절반은 미국 것이며 또 미국으로부터 차관의 절반은 장기 저리의 공공차관이었고 사회간접자본의 정비 및 기간산업의 육성에 사용되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무상원조가 대부분이고 차관이나 직접투자의 비중은 낮았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이 되면 차관의 도입이 급속하게 증대하여 1960년대말에는 외자도입액의 3/4을 차지하게 되었다. 외자는 대부분이 차관이었는데 차관도입은 1959년부터이지만 1959-65년 사이 누계액은 1억 4200만달러에 불과했는데 1966년에는 연간 1억달러를 넘어 1억 7300만달러로 되고 1959-65년의 7년간의 누계액을 크게 상회했다.
다음에 1967년 2억 1800만달러, 1968년 3억 6400만달러, 1969년 5억 900만달러, 1970년 4억 3000만달러, 1971년 6억 4500만달러, 1972년 7억 3700만달러로, 1966년부터 급속하게 증가하여 1966-72년 차관총액은 30억 8000만달러에 달했던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도입 차관은 1959-65년까지 7년간 7400만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급속하게 증가하여 1966-72년까지 13억달러에 달했다. 이 액수는 차관도입총액의 43%에 해당된다.
이 기간의 차관도입이 미국으로부터 급속한 증가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즉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방문 이후 미국으로부터 차관 도입이 급증했던 것이다. 즉 베트남 파병에 수반하여 대미관계는 극히 긴밀한 관계로 되었으며 미국자본이 대량으로 도입될 수 있게 되었다. 베트남전쟁과 한일조약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이후 미국의 대한군사원조는 급속한 증가 추세를 보였다. 미국은 1964년 군사원조 삭감을 통고했으나 1960년대 후반에는 한국군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군사원조는 급속하게 증가하여 1966-70년간 16억8000만달러를 기록했다. 1960년대전반에 비해 2배 이상의 비약적인 증가를 보인 것이다. 미국은 1964년 군사원조이관계획 실시를 통고했지만 한국의 베트남 전투부대 파견의 대가로 베트남에 한국군 병력의 파견이 이루어지는 동안 군사원조 이관계획의 실시는 중단되었다.
여기에서 군사원조 이관계획이란, 이제까지 미국의 직접 군사원조에 의해 충당되던 한국군의 무기 장비 탄약 중 국내생산이 가능한 것 혹은 한국정부 보유 달러를 갖고 수입할 수 있는 군사물자의 충당 책임을 한국 측에 이관하는 것을 말한다. 이 군사원조 이관계획의 중지에 의해 한국은 1966년부터 1970년까지 9300만달러의 예산을 절약할 수 있었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의 증대는 한국의 국방비를 억제시켰다는 점에서 경제적 효과는 극히 높았다. 1966-72년 7년간 군사원조액은 한국재정지출의 36.3%에 해당되며 또 국방비를 상회한다.
이를 통해 한국정부는 1968년1월 북한의 무장게릴라의 서울 침투,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으로 남북 간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었던 1960년대 후반 군사장비 구입을 위해 외화를 사용하지 않고 군비 부담을 경감할 수 있었다. 1960년대 후반 북한과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국방비의 부담을 경감할 수 있었던 것은 브라운 각서에 기초한 파병의 대가로서 군사원조의 대량화이다.
미국의 대한군사원조는 1960년대에는 후퇴하여 1961-65년 약 8억2000만달러였지만,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파견했던 1966-70년에는 약 16억 8000만달러로 2배 이상의 비약적 증가를 보였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군사원조액은 한국 재정지출의 연평균 37.1%나 되었다.
1960년대 후반 한국의 국방비의 거의 대부분을 미국이 부담했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재정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공업화 자금으로 그 여유를 이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재정투융자는 단지 거대한 국가의 정책의 소산이라기보다 베트남 참전에 수반된 군사원조의 대량화가 국방비의 감소를 가능하게 하고 그 결과 재정적으로 여유를 얻어 재정투융자가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1960년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은 자유시장의 작동의 자동적 결과도 아니라면 단순한 국가정책의 소산도 아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은 한국전쟁과 함께 시작되고 베트남 전쟁에서 확대재생산된, 동아시아 지역에서 영구군비경제의 효과였다.
[출처] 베트남 전쟁 참전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김세진|작성자 오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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