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이 명예다 / 황정혜
만남은 우연인 것 같지만 뒤돌아보면 아름다운 인연은 필연이라 생각한다. 할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우리 집은 양반 가문이다. 할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뭐라도 달라야 한다." 높은 벼슬을 하신 것도 아니고 평생 흙과 함께 사셨지만 곧고 정갈하셔서 요즘 시대에 왜 양반 가문이냐고 여쭐 수가 없었다. 오직 바르게 살아야 된다는 규범 속에 내 마음을 가두었다. 할머니는 남편의 첫 인상을 보고 말씀하셨다. "성격이 급하고 고집스럽게 생겨서 네가 마음고생이 많겠구나." 결혼하겠다고 하자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가장이란다. 항상 양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니 남편에게 잘 해야 하느니라." 할머니 말씀은 항상 귓전에 맴돌았다.
나는 고기 장사로 한곳에서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다. 지금이야 나이도 들고 부끄러움도 없어지고 자부심도 생겼지만 서른 살의 새댁에겐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부부가 한곳에서 24시간 함께 있으니 다투는 일이 많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잘못은 내가 다 뒤집어썼다. 남편의 불같은 성격에 꾹 참았다. 너무 그러니까 숨을 토해 내지 못했다. 남편은 놀라서 이제부터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라고 했다.
할머니 말씀도 거스른 채 자주 싸웠다. 어느 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했다. "저렇게 순한 사람을 데려다가 함부로 한다."고 남편을 나쁜 사람 취급하는 것이었다. 순간 깨달았다. 욱하는 성질 빼고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인데 착한 사람을 내가 나쁜 사람 만들고 있구나. 생각이 바뀌고 화가나면 남편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북항의 바다를 찾았다. 설움으로 응어리진 가슴을 부여 안고 바닷가에 외로이 선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바닷물에 쏟아내면 너울너울 밀려오는 잔물결은 슬픔을 싣고 떠난다. 철썩철썩 부서지는 파도소리는 큰 위로가 되었다. 역경과 시련도 긍정의 힘으로 바꾸면 더 나은 상황으로 바뀔 수 있었다. 서로 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진리였다. 사랑과 관심이 성공의 열쇠였다. 신용과 진실한 마음으로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며 항상 낮은 자세로 정성을 다했다.
까다로운 손님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더 좋은 단골 고객이 되었다. 믿고 먹을 수 있는 좋은 고기를 주셔서 고맙다고 말하면 행복하다. "원도심에 ㅇㅇ 식육점 같은 가게 몇 군데만 더 있어도 활성화가 될 텐데." 하시는 분들 얘기에 더 책임감을 느꼈다. 어느 날 자존심 강하신 ㅇㅇㅇ 사모님이 오셔서 남편에게 말했다. "사장님은 잔치를 해야 되겠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여사장 칭찬을 하니까요." 남편이 좋은 물건을 구매해 주니까 친절하게 했을 뿐인데 소문이 좋게 났나 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항상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엄마는 행동도 말도 예쁘게 하려고 노력하니 양반 가문의 처자가 맞는 것 같아요." 딸이 웃는다. 할머니는 가신 지 오래지만 말씀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울림이 되어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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