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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글방

빨래의 향기

by 嘉 山 2021. 6. 26.

빨래의 향기 /  황정혜


"탈탈 털어 쫙쫙 펴서 널어라." 할머니의 잔소리까지 빨랫줄에 걸린다. 튼실한 간짓대로 중심 잡고 마당 한가운데 늘어선 긴 줄에 겨울이 널린다. 이불 빨래하는 날, 무명 홑창 삶아서 방망이질 소리가 요란하다. 시집살이의 고단함도 설움도 다 날려보내는 엄마의 햇살 닮은 미소가 환하다. 부는 바람에 날아갈까 집게로 고정하고 묽은 밀가루 풀을 쑨다. 약간의 물기가 가시면 주물주물 풀을 먹인다. 빨랫줄은 힘들어 흐느적거리지만 풀 먹은 홑창은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몸을 맡긴다. 완전히 마르기 전 걷어서 할머니와 엄마는 호흡을 맞춘다. 두 귀를 서로 잡아 합치기를 여러 번 작은 네모가 된다. 수건에 싸서 꾹꾹 밟아 준다. 또 뒤집어서 다듬이질을 한다. 펼쳐서 다시 널어 겨울 볕이 유난히 뽀얗다고 느낄 때 말리기는 끝난다. 


목화솜 이불 속을 홑창 중앙에 놓고 귀퉁이를 잘 맞춘다. 몇 땀의 바느질로 고정해 놓으면 바느질이 쉬워진다. 이불깃을 예쁘게 꿰매야 시집살이가 고단하지 않다는 할머니의 손끝은 야무지다. 할머니 곁에서 무명실을 대바늘에 꿰어 길게 늘어뜨려 벽에 꽂아두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실 끝은 홀맺지 말거라." 그 매듭이 풀릴 때까지 고생한다며 가위로 자르고 직접 홀맺었다. 어린 손녀가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었으리라. 이불 몇 채를 꿰매 차곡차곡 개킨다. 풀 냄새 향긋한 포근한 이불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느낌이 이상했다. 새하얀 이불에 그려진 세계지도! 얼마나 힘들게 하신 이불 빨래였던가? "자면서 꿈을 꿨나 보다." 어른들의 너그러운 말씀에 나는 오래도록 빨래하는 일이 행복했다. 아이들이 옷을 더렵혀도 화가 나지 않았다. 


결혼하고 대가족인 우리 집 빨랫줄은 마당과 옥상에 각각 석 줄씩이었다. 평상시에도 빨랫감이 많았지만. 여름방학 때는 오전과 오후 두 번씩 가득 채워졌다. 호수로 뿌려대며 물싸움을 하고 뜀박질 소리에 마당은 즐거운 놀이터였다. 자전거 타다 넘어져 구멍난 바지에는 자라는 기쁨이 있었다. 운동장에 뿌려놓은 넘치는 에너지는 빨랫감에 고스란히 담겼다. 500원짜리 수박 한 통씩 차지하고 흘리던 분홍빛 웃음도 앞자락을 적신다. 널린 빨래는 나풀나풀 신이나 있고 지나는 바람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더 멀리멀리 날려보낸다. 마른 빨래를 걷을 때는 꼬실꼬실한 촉감에 계절의 냄새가 났다. 나는 그것을 햇볕의 향기라고 말했다. 


햇볕에 말려야 빨래 한 것 같다는 내게 남편은 황사와 미세먼지 때문에 밖에서 빨래를 말리면 건강에 좋지 않다며 건조기를 말했다. 심각성을 알기에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건조기는 참 편리했다. 날씨 때문에 빨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옛 사서에 따르면  "조선의 여인들은 우물가에서, 개울가에서, 꽁꽁 언 강가에서도 빨래를 했다." 잿물과 방망이로 빨래하던 할머니 시절의 고단함을 벗어나 세상은 많이 변했다. 인간은 한정적인 시간 안에 더 많은 일을 하길 원하고 발전해 왔다. 자동화와 우리의 삶은 이제 끊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구름만 걸린 빨랫줄을 보며 상념에 젖어 본다. 뽀얗게 삶아 다독이면 살가운 사랑 냄새가 났다. 반듯하게 걸려 있던 크고 작은 교복들은 희망이었다. 어른들의  노고가 깃든 깨끗한 빨래의 향기는 행복한 내일의 마중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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