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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글방

묵은지 같은 인생

by 嘉 山 2021. 10. 12.

묵은지 같은 인생


글감이 주어지면 가족에게 묻는다. 무엇을 소재로 쓰면 좋을까? 나를 잘 알기에 큰 도움이 된다. 이번 주는 취향이라고 말했더니  이구동성으로 김치 좋아한다는 말은 쓰지 말라고 한다. 밥 한 술 떠서 김치 한 가닥 척 걸쳐 넣으면 꿀떡꿀떡 요동치는 침샘에 입안 가득 채워지는 따끈한 밥과 시원하고 개운한 김치 맛의 조화로움에 푹 빠져든다.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는 어느 음식을 먹어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혼자 밥 먹을 때도 김치 한 가지만 놓고 먹지 말라고 늘 말한다.


학창 시절 도시락 반찬은 늘 엄마의 김치였다. 친구들이 맛있다고 먹어주니 제일 먼저 반찬통은 바닥을 드러냈다. 한참 클 때는 밥을 세 그릇씩 먹었다. 고추장에 쓱쓱 비벼 김치를 올려 먹으면 꿀맛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그 맛은 에너지원이었다. 우리 어머님도 음식 솜씨가 좋았다. 특히 새우젓을 넣어서 담그는 김치는 맛깔스럽다. 나는 김치 담그려는  생각만해도  머리가 무겁다. 그 깊은 맛을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종류는 많지만 익은 김장김치의 맛은 일품이다. 그래서 재료를 미리 준비한다. 5월 중순쯤 바지락이 제철이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바지락살을 주문한다. 천일염을 솔솔 뿌려 꾹꾹 눌러 김치냉장고에 보관한다. 김장 때쯤 열어 보면 노릇노릇해 있다. 짠맛을 잘 빼서 새우젓과 함께 넣으면 감칠맛이 최고다. 까마중(먹때깔 나무)으로 효소를 담군다. 3개월이 지나면 건더기는 버리고 발효시킨다. 다른 효소에 비해 순해서 조금만 넣어 주면 양념이 조화롭다. 감이 익을 무렵 단단한 대봉을 대바구니에 펼쳐 놓는다. 김장철에 사려면 냉장 보관된 것이라 맛이 떨어진다. 곱게 채에 바쳐 양념에 넣으면 더 맛있게 숙성된다. 고추도 첫 수학철에 사야 두껍고 맛이 좋다. 붉은색이 선명하고 윤기나는 것을 고른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고소하고 아삭한 배추를 골라 간질을 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엄마와 어머님께 맛있다는 평을 받아 조금씩 자신감이 생겼다. 김치냉장고 두 개 가득 채워 두면 부자가 된 기분이다.


식감이 아삭하고 잘 숙성된 맛의 묵은지는 발효 과학의 재탄생이다. 살아 보니 인생도 묵은김치와 같더라. 푸성귀 시절 초록의 싱그런 꿈을 꾸었지. 비바람 맞고 서리 맞아 소금에 절여지고 각종 양념에 버무려진 채 몸살을 겪고 나면 새로운 세상맛이 우러난다. 내가 녹록지 않은 시간을 살다보니 진솔한 사람이 좋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내면의 향기를 지닌 사람이 참으로 좋아진다.


우리의 취향은  바뀌는 것은 참 다행스럽다. 어린 시절에는 꽃을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 새싹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이제는 가을 햇살 한 줌 움켜쥐고 황혼의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는 단풍이 곱게만 느껴진다. 이런 무수한 변덕을 위해 세상이 그런 것처럼 우리는 한 취향에서 다른 취향으로 옮겨 다닌다. 내시간을 감사히 여기며 성숙해지는 삶은 묵은지의 깊은 맛과 같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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