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딸의 편지 / 황정혜
아들이 어버이날을 며칠 앞두고 부모님께 점심을 대접하겠다며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 애들은 개성이 강해 공평성을 많이 주장한다. 작년에 내 생일 때도 티격태격하기에 "다시는 너희들이 사주는 밥은 안먹겠다."고 엄포를 놓은 적이 있기에 거절했다. 이제부터는 절대 싸우지 않겠단다. 결혼한 큰딸과 둘째 딸이 돈을 내고 주방보조를 하기로 했단다. 아들은 음식을 만들고 셋째 딸은 설겆이를 하기로 결정했다. 전날 누나랑 장을 본 음식재료를 손질하느라 아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고기에 양념을 넣어 수육을 만든다. 밤새 해감한 바지락을 씻어서 물기를 뺀다. 마늘을 얇게 썰어 올리브유에 볶는데 주메뉴가 파스타라고 했다. 도우려고 하니 부엌에서 떠밀어 냈다. 오늘은 편히 쉬란다. 파스타, 수육무침, 오리 훈제 무쌈, 피자, 전골까지 푸짐하게 차렸다. 인증사진을 찍고 칭찬과 함께 맛있게 먹어주니 아들도 활짝 웃는다. 식구가 많으니 설거지감도 많았다. 손이 빠른데도 꽤 오래 걸렸다. "엄마! 다음엔 돈을 많이 벌어서 저도 언니들처럼 돈을 내야겠어요." 하며 웃는다. 그리고 두툼한 봉투를 내민다. 부모님께 고마운 일 백 가지를 쓴 편지였다.
어릴 때부터 제 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는 딸은 걱정할 게 별로 없었다. 장사하느라 신경 쓰지 못했는데 오히려 미안하고 고마웠다. 딸은 수시로 편지며 카드를 준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도 추위를 유난히 많이 타는 내게 카드와 함께 기모내의를 사주었다. "사랑하는 엄마! 기모내의를 입고 좋아하실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니 기뻐요. 몸도 연약하신데 늘 건강 신경쓰시느라 힘드시죠? 엄마 이제 아파도 돼요. 이제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는 딸이 되었답니다." 어느덧 훌쩍 자라서 엄마를 이해할 수 있다니 눈물이 핑 돌았다. 셋째 딸이 열네 살 때쯤 참 힘들었다. 체력이 약해 일년내내 감기를 달고 살았다. 힘에 부쳐 일하다 말고 집에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그날도 병자처럼 힘없이 누워 있었다. "다른 집 엄마들은 건강한데 엄마는 왜 맨날 아프냐고" 쏘아붙였다. 너무나 슬프고 괘씸했다. 하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편은 일 년에 두 번씩 보약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틈틈히 운동도 시켰다. 딸 덕분에 정신도 몸도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
오히려 잘 자라주어서 내가 더 고마운데 고마운 일을 백 가지나 썼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하고 산다는게 뭔지 몸소 보여주시는 부모님께 고맙습니다. 자식으로서 며느리로서 도리가 뭔지 직접 보여주시는 부모님 고맙습니다. 꿈을 이뤄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셔서 더욱 고맙습니다. 어디가서든 사랑받고 인정받는 사람으로 지내도록 이끌어 주시고 교육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과 평화를 가르쳐 주시고 지혜와 겸손함을 일깨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책을 많이 읽으셔서 원론적이고 이성적으로 문제 해결을 하시는 명철하고 지혜로운 아빠 고맙습니다. 항상 인스턴트 음식보다 사랑이 담긴 음식을 많이 만들어 주시는 엄마께 고맙습니다. 고마워하는 성품으로 길러주시고 자라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빠 엄마를 만날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고 정이 많은 언니들과 누나들을 좋아하는 동생을 선물로 주셔서 고맙습니다." 며 구구절절 진심을 담아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은 부모라는 이름을 반성하게 했다.
가끔은 아이들의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생각했다. 아들이 돌 지나고 큰딸이 2학년 때 장사를 하게 되었다. 엄마의 손길이 한창 필요한 아이들 때문에 하지 않겠다고 싸움도 많이 했는데 남편이 5년만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그런데 벌써 30년이 되었다. 아침 일찍부터 늦은 밤까지 고단한 시간이었다. 요즘엔 아이들끼리 부대끼면서 살았던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미어진다. 아이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들어 주기보다는 화부터 먼저 내는 자격미달의 엄마였다. 따뜻한 눈길, 따스한 포옹, 칭찬 한마디에 아이들이 자란다는 걸 알면서도 공감해 주질 못했다. 딸이 쓴 고맙고 행복한 순간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일상 안에서 손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지만 그것을 종종 망각한다. 어쩌면 더 아쉬운 것은 흘러가 버린 시간이 아니라 매 순간 기뻐하고 고마워할 줄 모르는 내 자신일지도 모른다. 부모가 아이를 더 사랑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이들이 조건없이 더 사랑한다. 그리고 더 빨리 용서해 주기도 한다. "신께서 나에게 특별히 살펴야 할 세개의 꾸러미를 보냈다. 대단히 귀한 것들이니 이 작은 선물들을 잘 돌봐라. 사랑을 다해 이들을 지켜봐라. 너의 손길을 느낄 수 있게 하라. 너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니 부족함이 없도록 잘 살펴라. 선물들이 아주 빨리 자란다는 사실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 그리고 어떤 모습이 되라고 강요하지 마라. 이 선물들이 완전히 성장했을 때 마음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라. 그리고 신의 크나큰 사랑으로 그들이 존재함을 다시 한 번 되새겨라." 딸아! 말 많은 엄마보다 사랑을 베푸는 엄마가 되도록 앞으로 더 노력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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