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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글방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by 嘉 山 2021. 6. 9.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 황정혜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뀔 때마다 10년 뒤의 내 모습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생각한다.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다. 우물을 벗어날 용기도 의지도 없는 성격이었다. 반백의 나이가 되도록 내가 품어야 할 가족과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는지 되돌아 보면 만족할 만한 성적표는 아니었다. 갈수록 자신감은 없어지고 몸은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한다. 남편에게 백두대간을 종주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들어주는 사람이라 흔쾌히 허락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남편이 왕복운전을 해야 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한 달에 한두 번씩 토요일 저녁에 출발해서 평균 15 ~ 25km 정도를 일요일 산행하기로 했다. 백두대간 지도를 사서 꼼꼼하게 공부했다. 다른 사람들의 산행기도 큰 도움이 되었다.


2012년 2월 26일 장사를 끝내고, 준비해서 출발했다. 나는 차에서 쪽잠을 잤지만 남편은 정신력으로 이겨 냈다. 어둠을 뚫고 세찬 바람을 맞으며 한 발 한 발 옮길 적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다. 남편이 앞장서고 나는 뒤따르는데 누군가 잡아 당길 것만 같았다. 둘만 걷는 깜깜하고 바람 소리 매서운 산길에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백두대간 괜히 했나 보다 생각하며 후회 했다.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자 북풍한설에 피어난 설화가 지리산 주능선의 웅장함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산자락을 휘감아 도는 운해는 풍덩 빠져들고 싶도록 환상적이었다. 여태까지의 힘들었던 순간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폐부 깊숙히 스며드는 바람결은 시리면서도 상쾌했다.  새하얀 눈길에 새겨진 또렷한 발자국에 희망을 본다. 가끔 만나는 소나무 숲은 그윽한 솔잎향과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편안한 길이다.


철쭉 군락지의 질펀한 길에서 두 번이나 꽈당하고 미끄러져서 함박웃음 짓는다. 늦게까지 눈이 녹지 않은 산길은 미끄러운데 아이젠을 준비하지 않아 조마조마했다. 남덕유산에서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를 하루종일 맞았다. 다음날 향적봉에 쏟아지는 별빛은 나약한 내 마음을 한없이 어루만져 주었다. 암릉이 많아 하루종일 줄을 타고 오르내리던 조령산, 좁은 바위틈에서 끌어 주고 밀어 주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기에 묵묵히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남편이 나무 뿌리에 미끄러져 무릎 안쪽 인대가 늘어났는데 네 시간 정도 더 걸어야 하산이었다. 힘들어하는데도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어 많이 안타까웠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매기도 하고 몸상태가 좋지 않아 그날의 목표 지점까지 가지 못할 때도 있었다.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가끔 만나는 사람들에게 큰 힘을 얻는다. 가야 할 길은 까마득한데 걱정이 태산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잘 이겨 낼 수 있을까?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우리 땅의 뼈대를 이루며 이어진 산줄기이다. 남한에서 종주할 수 있는 거리는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약 670km이다. 처음엔 대학생들이 중심이 된 산악인들이 길을 텄다. 사람의 흔적이 다 지워져 가시덩쿨로 뒤덮인 길을 헤치며 온몸으로 금을 그어 나갔다. 그들의 피땀과 열정으로 한반도의 뼈대라는 것을 확인했다. 지금은 산행에 대한 지식과 체력이 있다면 누구나 종주할 수 있을 만큼 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말없는 산과 끊임없이 내면의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면 히말라야 도보 여행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을 풀어놓은 듯한 느낌이 매순간 이지만 어머니 품 같은 따뜻함에 또 안기고 싶다. 위험 구간인 육십령에서 남덕유, 삼봉산에서 도마치고개, 속리산에서 밤티재, 대야산에서 촛대봉재, 점봉산에서 한계령 사이는 더 조심해야 한다. 매서운 추위와 어둠과의 싸움에 후회하지만 아침을 여는 숲 속 이야기에 매료되어 다시 힘을 얻는다. 


강원도로 접어들면서 여섯 명이 합류했다. 거리가 멀어 운전하기가 너무 힘들었고 산세도 험해지니 펜션을 예약해서 숙박을  하면서 이틀 연속 산행을 했다. 가끔 만나는 통제 구역은 랜턴을 끄고 가야 한다는데 한 발짝도 내딛기 힘들었다. 험난한 암벽에 불안감까지 더해지니 진땀이 났다. 바위에 매달린 밧줄을 잡고 더듬거리며 올라가는데 줄이 뚝 끊어졌다. 다행히 뒷사람이 받아주어서 사고를 면했다. 두 번 나누어서 할 구간을 하루에 끝낸 날도 있었다. 한계령에서 미시령 구간이었다. 26.5km였지만 마실 물은 다 떨어지고 체력은 바닥이었다. 맨밥을 꼭꼭 씹으면서 허기를 달랬다. 계속 걸음을 재촉하며 정신력으로 버텨 낸다. 산행 초입에는 칠흑같이 어두운 적막감이 우리를 맞이한다. 마치 시커먼 입을 벌린 동굴로 들어가는 느낌이어서 매순간 두려웠다. 하지만 무수한 보석을 박아 놓은 듯한 아름다운 별빛과 신선하고 상쾌한 새벽 공기, 아름다운 일출에 감사했다. 새소리와 계곡의 물소리 곱고 향기로운 야생화, 웅장한 산새와 편안한 숲길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었다. 


드디어 백두대간 종주를 끝냈다. 너무나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3년 반 만에 이룬 쾌거였다. 50대의 내 삶에 또 하나의 아름다운 무늬를 장식하며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고도의 집중력과 의지, 매사에 긍정하는 마음가짐과 성실함이 빚어낸 소중한 삶의 가치였다. 남편이 몇 구간만 빼고 고된 일과 끝내고 잠 못 자고 운전해서 열시간 이상 산행 후 또 차를 몰고 돌아오니 고생을 참 많이 했다. 긴 시간 동안 멀고 먼 길을 소통과 교감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였기에 마음껏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었다. 백두대간 종주를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아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며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을 더 많이 사랑하며 최고의 날이 되도록 노력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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