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는 문학적 성격에 따라 민요 계 향가와 사뇌가 계 향가로 구분할 수 있다.
민요 계 향가는 민요적 전통의 집단적 서정에 기반을 두었고 민요적 전통 속에서 산출된 문자문학으로서의 민요시적 성격을 지닌 유형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민요 계 향가는 구술 행위가 중심인 민요적 성격과 문자 행위가 중심인 창작시적 성격을 공유하고 있다. 이는 향찰을 비롯한 차자표기법의 발달에 따른 문자문학의 영향으로, 종래의 소박한 전승민요가 미적 세련성을 획득하면서 우리 문학사의 전면에 부상한 새로운 형태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민요 계 향가는 민요적 모티브를 직접 차용하여, 새로운 의미와 기능을 지닐 수 있도록 민요적 어법으로 재 문맥화 하는 수법에 의존하고 있다. 민요라기보다는 전래적인 민요양식의 패러디를 통해 노래의 성격과 기능을 전환시킨, 본래의 민요와 구별되는 새로운 형태의 노래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동요]는 전래동요를 직접적 모태로 하되, 전래동요를 주술 계 노래와 통합하는 기능적 합성을 통하여 재 문맥화한 노래이다. [풍요]는 방아 노래를 직접적 모티브로 하되, 노동요를 불교적 공덕가로 바꾸는 기능적 전이를 통하여 생성된 노래라 할 수 있다. [헌화가]와 [처용가]의 경우 노동요나 유희 요에서 흔히 볼 수 있듯 남녀 간에 짝을 찾을 때 부르는 전래적인 구애요의 발상법에 전적으로 의존하거나 대상과의 친화관계 형성을 통해 주술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전래적인 화해적 주술의 어법을 원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요적 전통 아래 생성된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요 계 향가는 오랜 전통을 지닌 대표적인 민요형식이며, 향유 기반 역시 민요의 중심 향유층 인 기층민이다. 또한 기층민적 상상력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만큼, 이들 시의 담론양식 역시 서정시로서의 전형성을 띄지도 않는다. 작가적 성격 역시 익명성 작가라는 점에서 민요적 전형성을 띄고 있으며 역사적 실명의 형태로 작가가 제시되고 있으나, 이 역시 허구적 상상력과 결합된 설화 내지 신화적 인물의 역사화라는 익명성 작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기층민의 집단적 감성에 의거하여 노래를 생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요와 공통의 자장을 형성하고 있다.
역사적 흐름에 따른 민요계 향가의 다양화는 형식에서도 나타나는데 [서동요]나 [풍요]에서 보듯 초기의 민요계 향가는 4구 단연형의 단순 소박한 형식이었으나, 후대로 가면서 4구 2연형의 연장체 형식이 나타나고 있다.
즉, 민요계 향가는 향가의 전성기라 할 8~9세기 무렵 상층 지식인 사회로까지 확대되는 향유층의 확산과 기층민 중심의 민요시 계열과 상층 지식인 중심의 창작시 계열로 분화되는 양식적 다변화와 더불어, 4구 단연형과 4구 2연형으로 분화되는 형식적 다변화가 일어난다.
사뇌가계 향가는 민요계 향가와는 대조적인데 창작시의 전통에 기반을 둔 전형적 개인적 서정시이다. 예를 들어 사뇌가계 향가로서의 [제망매가]는 종교적 성스러움의 노래라는 인상보다 차라리 누이동생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마음의 평정심을 잃은 한 수도승의 인간적 고뇌를 드러내고 있는 노래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제망매가]는 인간적 고뇌를 불교적 관념으로 포용할 수 있는 서정적 유연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 서정시로서의 사뇌가계 향가가 보이는 서정적 특성은 종교적 성스러움의 관념이든 정치적 이념이든 기본적으로 개인의 현실적, 인간적 감정을 일방적으로 억압하지 않는 서정적 포용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제망매가]만이 아니라 [원왕생가], [우적 가]와 같은 다른 불교적 관념의 노래에서도 그러하며, [모 죽지랑 가], [찬기파랑가]와 같은 화랑 예찬의 노래에서도 그러하다.
또한 정형시로서 지니는 사뇌가 계 향가의 구조적 짜임을 보면 10구체 형식의 사뇌가 계 향가는 3단 구조로서의 정연한 짜임을 지니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10구가 통단으로 연속되는 단연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1~4구로 이루어진 앞 절과 5~8구로 이루어진 뒷 절, 그리고 9~10구로 종결되는 후구(後句)등 세 개의 단락으로 짜인 일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 개의 단락은 각각 시적으로 하나의 작은 의미 단락을 이루고, 이들 시적 단락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하나의 완결된 시편을 이룬다. 대체로 앞 절에서는 시상을 제시하고, 뒷 절에서는 앞 절의 시상을 발전 내지 심화시켜, 마지막 낙구에서 시상을 서정적으로 통합해 내는 정교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특히, 낙구의 첫머리가 반드시 ‘아아’와 같은 탄사로 시작된다는 규칙은 정형시로서의 사뇌가 계 향가가 지닌 중요한 형식적 징표라 할 수 있다. 3단 구조와 탄사로 대표되는 사뇌가계향가의 이러한 형식적 짜임은 후대의 시조로까지 이어지는 한국시의 중요한 형식적 전통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다음으로 사뇌가 계 향가의 향유기반은 상층 지식인이다. 지적 세련성을 갖춘 상층 지식인의 개인적 표현 욕망을 담아낼 수 있는 가장 대표적 정형시였다고 할 수 있다. 노래된 세계가 불교와 관련된 노래, 화랑과 관련된 노래, 정치와 관련된 노래 등 지배층 지식인들의 주요 관심사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음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이에 따라 작품의 창작에 참여한 작가들 역시 신라 사회의 대표적 지성이라 할 승려나 화랑 출신의 상층 지식인들이 중심을 이룬다.
사뇌가 계 향가는 작가의 실명성의 약화 현상이 나타난다. 대부분의 작가 이름이 작품이나 배경설화와 연관된 이름으로 명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명성의 약화 현상은 사뇌가 계 향가가 지닌 작가성의 특수함을 이해해야 할 성질의 문제이다. 곧 향가의 작가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작가들이 작품에 대하여 지니는 위상보다 훨씬 약화된 위상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달리 말하면 작품의 해석에 미치는 작가의 영향력이 현대처럼 그렇게 강력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뇌가 계 향가 중에서는 일반적인 작가적 성격이 아닌 예외적 작품이 있다. [도천수대비가]는 기층민의 작가적 개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익명성 작가에 가깝다. 작품의 성격 또한 전형적인 개인 창작시로서의 일반성을 벗어나, 민요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는 예외성까지 보내고 있다. 작가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란을 일으킬 만큼 모호하다는 자체가 작가성이 희박한 민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며, 천 개의 눈 가운데 하나만 덮어 달라고 투정하듯 기도하는 노래의 어조도 민간 신앙적 소박함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다.
이를 보았을 때 [도천수대비가]는 사뇌가 계 향가 또한 상층 지식인 중심의 개인 창작시라는 단일한 성격만을 유지한 노래양식이 아니었음을 시사해 준다. 작가의 예외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뇌가 계 향가 역시 향유층을 기층민으로까지 넓혀 나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개인 창작시적 성격의 사뇌가 양식을 끌어와서 자신들의 신앙과 미의식에 맞는 감성양식으로 창작한 것이 곧 [도천수대비가]라고 할 수 있다.
기층민의 사회의 사뇌가 계 향가 수용은 두 방향에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원 앙 생 가]처럼 노래의 성격을 자기네들의 집단적 감성에 맞도록 변용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천수대비가]처럼 사뇌가 계 양식을 자기네들의 감성에 맞추어 창작을 하였던 것이다.
민요계 향가 작품에 대한 설명
서동요
● 원문
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 夗[卯]乙抱遣去如
● 현대어 풀이.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해 두고/ 서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 구절 풀이
[선화 공주님은/남 몰래 정을 통해두고]
서동이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려고 선화 공주를 어려움에 빠트리는 것으로, 행위의 주체와 객체를 전도시킨 표현이다. 즉, 서동이 자신의 잠재적 갈망을 선화 공주라는 상대편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서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서동과의 밀애를 표현한 부분으로 표면적으로는 선화 공주가 서동을 안고 간다고 표현했지만, 이면적으로는 서동이 노래를 퍼뜨려 얻게 되는 결과를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선화 공주를 얻기 위한 서동의 계략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부분이다.
● 배경설화
백제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의 어머니는 과부로,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못에 살고 있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장은 어려서부터 마를 캐어 팔아 생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서동이라고 불렀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 공주가 매우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경주로 몰래 들어가 공주를 자기 아내로 삼을 방법을 생각하다가, 이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면서 부르게 하였다. 노래는 삽시간에 온 경주로 퍼졌고, 마침내 대궐에까지 전해지자 진평왕은 공주를 멀리 귀양 보내기로 하였다. 왕후는 쫓겨나는 공주가 애처로워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지에 이를 즈음 도중에 기다리고 있던 서동이 슬픔에 잠긴 공주에게 동행이 되자고 하였다. 그 후에 서동은 공주를 아내로 맞아 백제로 돌아가 함께 살았는데, 공주를 통해 금이 보배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서동은 자신이 마를 캐던 뒷산에 그런 것이 얼마든지 있다 하였고, 그 금을 캐어 인심을 모으고 마침내 백제의 왕이 되었다.
● 작품해설
이 노래는 신라 제 26대 진평왕 때 백제의 무왕이 지었다는 4구체 향가로, 남녀 간의 사랑을 내용으로 했던 전래 민요가 동요로 정착된 유일한 노래이기도 하다. 신라의 선화 공주를 연모하던 서동이 감자 캐는 아이로 변장하여 신라에 잠입한 뒤 아이들에게 이 노래를 퍼뜨려, 부모의 질책을 받고 쫓겨난 선화 공주를 아내로 맞고 그 후 백제 무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미모의 공주를 아내로 삼고자 하는 서동의 갈망에 따라 서동이 사랑의 주체와 객체를 교묘하게 전도시켜 사랑을 성취한 노래이다.
노래의 내용은 남녀상열의 행동을 직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는 서동이 당시에 전승되어 불리던 민요를 입수하여 그 가사에 고유 명사인 서동과 선화 공주만을 대체시켜 소원 성취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편, ‘서동요’에서는 동요적인 단순성은 발견할 수 있으나 깊은 문학적 배경은 발견하기 어렵다. 다만, 배경 설화의 내용처럼 서동이라는 한 영웅이 시련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다는 영웅 설화의 공식적인 과정을 밟는다. 영웅의 일생은 결혼에 의해 성공의 길로 접어든다. 따라서 ‘서동요’는 이런 성공의 기능을 제시하고 있다.
‘서동요’는 서동의 계략에 의해 지어진 일종의 참요로, 미모의 공주를 아내로 삼고자하는 한 소년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주술성’을 띤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주술성’을 좀 더 넓게 해석하여 노래의 힘을 빌려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였다는 점에서 ‘서동요’는 주술적인 성격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서동은 선화 공주와의 사랑을 실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노래에 담아 사람들 사이에 퍼뜨렸고, 마치 노래가 주술적 힘을 발휘한 것처럼 자신이 원하던 대로 선화 공주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다.
2. 풍요
● 원문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 현대어 풀이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들이여/
공덕 닦으러 오다
● 배경설화
이 노래와 관련되는 연기 설화는 다음과 같다.
석 양지(良志)의 조상이나 고향은 알 수 없고, 오직 그 행적이 선덕왕 때에 있었다. 석장(錫杖) 끝에 베주머니를 걸어 놓으면 석장이 저절로 날아가 보시하는 집에 가서 흔들어 소리를 내며, 그 집에서 알고 공양미를 넣어서 자루가 차면 석장이 날아서 절로 돌아왔으므로 석장 사(錫杖寺)라 하였다 한다. 신기함이 대개 이와 같이 헤아릴 수가 없으며 그 밖 에도 여러 가지 재주가 있었다.
또한 문장이 능숙하여 영묘사 장륙존상을 만들 때 장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무엇을 다지거나 하는 일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니 이 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 작품해설
『삼국유사』 권4 ‘양지사 석(良志使錫)’에 실려 있다. 영묘사(靈廟寺)의 불상을 만들 때 그 일을 도와주려고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이 노래를 지어주고 일을 하면서 부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오구라(小倉進平)는 이 노래를 『삼국유사』의 조목대로 「양지사 석」이라 하였고, 양주동(梁柱東)은 「풍요」라 하였다. 김선기(金善琪)는 「바람결노래」라 불렀고, 그 밖에도 홍기문(洪起文)는 「오라가」, 김사엽(金思燁)은 「오라노래」라 하였다.
『삼국유사』에 사용된 ‘풍요’라는 명칭은 노래의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민요라는 노래성격으로 지칭한 것이다. 「풍요」란 민요라는 뜻으로, 성중의 남녀들이 불렀던 민요가 바로 이 노래이다.
이 작품의 해독에서 가장 큰 특징은 정열모의 것이다. 여래(如來)의 해독을 양주동, 홍기문, 김완진 등은 모두 오다, 오나, 오라 등으로 하여 비슷한 뜻으로 풀고 있는데, 정열모는 오료로 해독했다. 그리고 ‘哀反多羅(애반다라)’에서는 ‘애돌 하나’로 읽어서 ‘서러움이 많다’로 해독했다. 의미상으로는 다른 이들의 해독과 비슷하지만 해독하는 방법이 특이하다. ‘哀反多矣(애반다의)’ 역시 ‘애돌 하이’로 읽어서 문장의 끊음과 해독상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徒良(도양)’의 해석은 양주동, 홍기문, 오꾸리 등은 ‘矣徒良(이도양)’을 하나로 보아 ‘의내여’로 풀이한 반면, 김완진은 多矣(다의)와 徒良(도양)을 끊어서 중생의 무리로 해석한 점이 특이하다.
‘온다’는 말의 연속적인 반복은 끝에 공덕을 닦으러 온다는 말로 결론을 맺고 있다. 이런 형태는 민요의 원형으로서 후대에 이와 같은 민요형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아울러 송영적(頌詠的) 성격을 지녀 음악성을 느끼게 한다.
노래 가운데 ‘서럽더라’는 믿음이 없는 현세의 삶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노래는 현존 향가의 민요적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 형태의 노래 「서동요」나 「헌화가」와 같이 신라의 향가가 여러 사람들에 의해 불렸고 또한 그 속에는 불교의 포교적인 교리가 은연중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후대에 오면서 이 노래는 방아를 찧거나 무엇을 다지거나 하는 일에는 두루 이 노래를 부르니 방아 찧는 노래는 바로 <공덕가>부터 시작된 일이라 한다.” ‘오다’(또는 오라, 온다)라는 말이 네번이나 반복되어 오고 또 오는, 그리고 다시 또 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시간을 초월하는 무수한 행렬을 연상시킨다. ‘서럽다’를 반복하는 표현은 현실의 인생은 허망하고 순간적이라는 사실을 힘써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살아서 열심히 공덕을 닦자는 것이다. 오는 것을 공덕 닦기 위한 일로 대치시키고 있다. 불사를 창건하고 불탑을 만드는 일은 모두가 공덕 쌓는 일이다. 공덕가에서는 세상 살아가는 일 자체를 공덕 쌓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풍요’란 말 뜻은 민요를 의미한다. ≪시경 詩經≫의 국풍(國風)의 시들은 제왕이 민요를 채집하여 지방의 풍속을 살폈다는 의미에서 풍(風)이라 한 것인 바, 일반적으로 ‘풍요’란 민중들의 구전 민요를 뜻한다. 그런 점에서 이 노래의 제목을 <공덕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3. 도솔가
● 원문
今日此矣散花唱良
巴寶白乎隱花良汝隱
直等隱心音矣命叱使以惡只
彌勒座主陪立羅良
● 원문 해석
오늘 이에 산화 불러
뿌린 꽃이여 너는
곧은 마음의 명 받아
미륵좌주 뫼셔라.
● 작품 해설
신라 경덕왕 19년(760)에 월명사(月明師)가 지은 향가. ≪삼국유사≫ 월명사 도솔가조에 전한다. 760년 4월 초하룻날 두 해가 함께 나타나서 10여일간 없어지지 않자, 왕이 일관(日官)의 청으로 청양루(靑陽樓)에 행차하였다.
왕이 청양루에서 연승(緣僧)인 월명사를 만나 단(壇)을 열고 계(啓)를 지으라 하여, 월명사가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형식은 4구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띄어쓰기에서는 3분절되어 있다.
유창균(兪昌均)은 “오 이 散花(산화) 브르라/돌보본 고라 너흰/고 命人(명인) 브리아기/彌勒座主(미륵좌주) 모리라라.” 라고 읽은 바 있다. 이러한 독법에 의해 ‘오늘 이곳에 모든 화랑(花郞)을 부르는 바라. (나라의)은총을 입고 있는 화랑 너희들은, 한결같이 굳은 마음으로 목숨을 바쳐, 여기에 미륵좌주를 뫼셔 받들 것이로다.’라고 해석하였다.
이 작품을 김동욱(金東旭)은 미륵청불(彌勒請佛)의 불교가요로 보는가 하면, 김열규(金烈圭)는 <구지가 龜旨歌>와 그 성격을 같이하는 것으로 본다. 즉 김열규는 <구지가>를 전통적인 주사(呪詞)에 직접 맥을 대고 있는 주사적 양식의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한편 김종우(金鍾雨)는 ‘미륵좌주’라는 말을 낭·불융합(郎佛融合)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독특한 용어로 보고, 작품은 순불교적인 가요로 각각 파악하였다.
<도솔가>는 하늘에 해가 둘 나타난 괴변을 없애기 위한 의식에서 불린 노래이다. 합리적 사고로는 하늘에 해가 둘 나타나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두 해가 함께 나타났다.”는 것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며, 우회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천상계와 인간계의 대응관념으로 보았을 때, 해는 곧 왕에 대응된다. 하늘의 두 해 중 하나는 현재의 왕에 도전할 세력의 출현을 예보해 준다. 이러한 세력의 출현은 혼돈을 빚고, 그래서 이 혼돈을 조정할 행위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이와같이, 왕권에 도전하려는 세력들에 의한 사회적 혼란을 조정하기 위하여 행해진 의식이 산화공덕이고, 이 의식에서 불린 노래가 <도솔가>이다.
그러나 이 산화공덕은 순수한 불교적인 관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재래신앙의 차원에서 불교의식을 수용한 상태의 것이다. 즉, 재래의 천신숭배사상에다 시조강림관념은 쉽사리 미륵하생관념(彌勒下生觀念)을 받아들였고, 그것이 변용되어 미륵좌주로 나타난 것이다. 거기에 계를 지으라고 함에 향가로 대신하는 양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 작품에는 국가태평 또는 평정을 기원하는 제의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신을 불러내는 말이 재래 양식 그대로 쓰이고 있다. 다만 시대적인 상황의 변천에 따라 불교적인 미륵하생관념이 혼융되기는 하였다.
즉, 위협적인 모습은 인심의 순화에 따라 완곡의 표현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나, 명령법이라는 것이 아직도 작품에 그대로 남아 있어, 고대 제의에 사용되던 주가적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4. 헌화가
● 원문
紫布岩乎邊希/執音乎手母牛放敎遣/吾肸不喩慚肸伊賜等/花肸折叱可獻乎理音如
● 원문 해석
딛배 바회 자온손 암쇼 노시고
나 안디 붓리샤
곶 것가 받오리이다.(양주동 해독)
● 현대어 풀이
붉은 바위 끝에(제4구 꽃으로 연결), (부인께서) 암소 잡은 (나의) 손을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시지 않으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
● 작품해설
신라 성덕왕(聖德王) 때 한 노인이 지었다는 향가이다.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水路夫人)이란 제목 아래 노래와 아울러 이와 관련되는 다음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성덕왕 때 순정 공(純貞公)이 강릉태수로 가다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 옆에 석벽이 있어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둘러싸고 있고 천야만야한 꼭대기에 진달래꽃이 한창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가 보고 저 꽃을 꺾어다 바칠 자가 누구냐 하니 마침 옆에 있던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다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꺾어 바치면서 노래를 지었다. 이 노래가 바로 향가 <헌화가>이다. 그 노인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노래 말 해독은 해독 자에 따라 이견이 그리 크지 않다. 문학적 해석 가운데 주목되는 견해는 구애의 노래로 해석하는 것이다. 수로부인의 빼어난 아름다움에 매혹된 남성이 꽃을 꺾어 바치며 구애의 노래를 부른 것이 바로 이 노래라는 것이다. 노래를 지어 바치고 꽃을 꺾어 드리는 인물로 이 이야기에서는 노인으로 형상화시켰다.
그간 이 노인의 정체를 불교에서의 선승, 도교적인 신선, 혹은 무속적인 신격 등 귀속의 논리에 따라 해석하기도 했지만, 이야기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야기 문맥에서 중요한 사실은 노인의 초자연적,신화적 인물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는 일이다. 노인 헌화의 이야기는 곧 노인으로 대표되는 신비로운 신화적 인물까지 능히 움직일 수 있는 여성적 아름다움의 마력적 힘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즉, 인간이 인간에게 건네는 구애의 노래가 아니라 신화적 인물이 인간(여성)에게 바치는 구애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삼국유사≫에서도 수로부인은 자용이 매우 아름다웠기에 그녀가 바다이거나 깊은 산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수차례에 걸치어 신물(神物)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탐미적인 미녀 앞에서 완악한 완부가 애정을 읊조린 서정시로 신라인의 미의식을 나타내주고 있다. 꽃을 향한 수로부인의 정서와 미인 수로부인을 향한 노옹의 정서의 대조가 미의 상징일 수 있는 꽃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철쭉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붉은 바위와 손에 잡고 있는 암소의 대조로 물욕에만 사로잡힌 비린(鄙吝: 눈에 거슬릴 정도로 인색함)을 스스로 느낀 노옹은 숭고하리만큼 아름다운 꽃을 탐내는 절세미녀의 탐미심 앞에서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대상에 투사하여 자기에게 나타낸 자기표출로서 미의 추구를 최고의 욕망으로 나타내었다.
5. 처용가
● 원문
東京明期月良夜入伊遊行如可入良沙寢矣見昆脚烏伊四是良羅二肸隱吾下於叱古二肸隱誰支下焉古本矣吾下是如馬於隱奪叱良乙何如爲理古.
● 현대어 풀이
"동경 밝은 달에 밤 이슥히 놀고 다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해였고 둘은 뉘 해인고. 본디 내 해다마는 빼앗는 걸 어찌 하리
● 배경설화
헌강왕이 개운포(현재 울산)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용의 조화로 인해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어서 길을 잃게 되었다. 말이 끝나자 곁에 있던 신하들 말에 따라 용을 위해 이곳에 절을 세우면 변괴가 사라질 것이라 해서 곧 명하여 절을 세우도록 했다. 말이 끝나자 곧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용이 아들 일곱을 데리고 나와 왕의 은공을 칭송하였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에 가서 정사를 돕도록 하였다. 그가 바로 처용이다. 처용은 동해 용의 아들이다. 왕은 처용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급간(級干)이라는 벼슬을 주었고 아름다운 미녀를 아내로 맞게 하였다. 어느 날 처용은 밖에서 지내다 밤 늦게 집에 들어 잠자리를 보니 역신(疫神)이 처용 아내의 아름다움을 흠모하여 사람 모습으로 변신하여 처용의 아내를 범하였다. 처용은 역신 앞에서 노래와 춤을 추어서 역신을 물리쳤다. 이 때 역신은 처용 앞에 꿇어 앉아 처용 위용에 감복하여 이후로는 처용의 얼굴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처용의 화상을 문에 붙여 사기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이하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처용 화상은 후대에 문신(門神)이 되었고, 이런 습속이 뒷날 고려와 조선 시대 후기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처용이 역신을 쫓아낼 때 부른 노래가 바로 처용가이다.
● 작품해설
신라 헌강왕 때에 처용이 지은 향가이다.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 조에 이 노래가 만들어진 사연과 함께 실려 있다.
8구체 향가로 그 구성은 크게 2단락으로 묶어 볼 수 있는데 앞의 것은 현실적인 상황을 뒤의 것은 내면의 태도를 드러낸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적 구성을 통해 볼 때 적극적인 화해 혹은 적극적인 관용에 그 미학의 핵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향가 <처용가>의 이런 태도와는 달리 고려시기 <처용가>에서는 반대로 처용신 앞에 열병신을 먹잇감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처용신의 위압적인 모습을 들어냈다. 신라의 <처용가>가 고려시기에 와서 크게 달라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편 처용랑 망해사 조 이야기의 핵심은 헌강왕의 망해사 창건담에 더 무게가 실림을 알 수 있다.
처용의 존재에 대해서는 ① 벽사가면의 인격화[現人辟邪神]설, ② 반중앙적 지방 호족의 아들로서의 질자(質子:아들을 인질로 보냄)설, ③ 이재술(理財術)을 지녔던 이슬람 상인설, ④ 호국호법룡의 불교 상관 인물설, ⑤ 무격(巫覡) 또는 무격의 몸주[主神]설, ⑥ 풍월도적 미륵신앙을 갖고 있는 화랑설 등이 있다.
이름에 대해서는 훈차로 본 ‘터알 바가지’설, ‘곧즛’(龍顔)설, ‘곶얼굴’(花容)설과 음차로 본 ‘무(巫)’의 뜻인 ‘자충’(次次雄→慈充)설, ‘용(龍)’의 뜻인 ‘칭’(稱)설, ‘청룡’(靑龍)의 이기(異記)설 등이 있다.
처용의 왕정 임무에 관해서는 ① 그의 본고장 울산의 사정에 관한 정부의 자문 임무설, ② 신라 말기 위기에 처한 경제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이재가(理財家)로서의 보좌설, ③ 역신(疫神)을 물리치는 굿으로서의 보좌설, ④ 의무(醫巫)로서의 보좌설, ⑤ 무격으로서 주술과 가무로써 기상의 변괴를 물리치는 직책설, ⑥ 왕권 강화와 국가 수호의 임무설 등이 제기되었다.
역신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열병신(熱病神=천연두·홍역·학질을 일으키는 질병신)으로 보고 있으나, ① 병든 도시의 유한공자(遊閑公子), 곧 타락한 화랑의 후예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 ② 탐락과 방탕 풍조에 빠져 있던 반도덕적인 패륜아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 ③ 나라를 병들게 하는 어두움과 악의 화신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처용가>의 내용과 형식은 시적 화자가 역신의 화자 처 범접(犯接)을 보고서 그 현장 상황과 그에 대한 화자의 대응태도를 일인칭 독백체 형식으로 노래하되, 노래에는 주가(呪歌)의 성격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처용이 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나니 역신이 처용의 노하지 않음에 감복하여 사죄하고 물러갔으므로 이 노래를 일반적으로 주가로 본다.
한편 이 <처용가>에 대해 ① 의례의 한 부분이던 신화[무가] 중의 일부로써 주적 정조인 창사 부분의 일부라는 견해, ② 처용이라는 법행룡(法行龍)이 창한 일종의 진언(眞言)이요 불교적인 주문이라는 견해, ③ 주술 기원의 재연(再演)인 서사 부분과 짝해서 역신 퇴치 주술의 핵을 이루게 된 주사라는 견해, ④ 처용신의 유래를 설명한 서사무가에 삽입된 주술 무가라는 견해, ⑤④ 강자에 의한 아내의 정조 유린이라는 비애를 골계로 표현한 민요 격 향가라는 견해, ⑥ 동해의 용신제의(龍神祭儀)에서 불리던 무가라는 견해 등이 제기되어 있다.
이 노래는 가사가 부연되어 고려·조선 시대의 나례(儺禮: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궁중이나 민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해 베풀던 의식) 공연 때 처용가무에서 불린다.
사뇌가계 향가 작품에 대한 설명
모죽지랑가
● 원문
去隱春皆林米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是
郞也 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 원문해독
“간봄 그리매/모든 것 우리 시름/아 나토샤온 즈/살쯈디니져/눈 돌칠 이예/맞보디지리/郎이야 그릴 녀올 길/다봊 잘 밤 이시리(간 봄 그리매/모든것사 설이 시름하는데/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이/주름살을 지니려 하옵내다/눈 돌이킬 사이에나마/만나뵙도록(기회를)지으리이다. /郎이여, 그릴 마음의 녀올 길이/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이까.
● 현대어 풀이
간 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서러워 시름하는데 아름다움을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으려 하옵내다.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만나뵙도록 하리이다.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는 길이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이까. (최철 풀이)
● 배경설화
신라 제 32대 효소왕 때에 죽지랑의 낭도 가운데 ‘득오’라는 급간이 있었다. 화랑도의 명부에 이름을 올려 놓고 매일 출근하더니, 한 열흘이 되도록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이 그 어미를 불러 아들이 어디에 갔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어머니는 “당전 모량부의 익선아간이 제 아들을 부산성 창직으로 차출시켜 급히 달려가느라 미처 낭에게 하직 인사를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죽지랑은 이 말을 듣고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이 그곳에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지마는 공사로 갔다니 마땅히 찾아가서 대접해야겠소.”라고 하였다. 죽지랑이 밭으로 찾아가서 술과 떡을 대접하고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같이 돌아오려 하나 익선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사리 간진이 추화군에서 조세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싣고 가다가, 죽지랑이 선비를 중히 여기는 정을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이 융통성이 없는 것을 야비하게 생각하여, 거둔 벼 30석을 주며 휴가를 청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진절사지가 쓰는 말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하였다.
조정에서는 화랑을 관장하는 이가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 추한 마음을 씻어 주려 하였는데, 익선이 도망쳐 버렸으므로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갔다. 때는 동짓달 극히 추운 날이었는데, 성 안의 못에서 목욕을 시키니 얼어 죽었다. 일찍이 득오가 죽지랑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어 부르니, 이것이 ‘모죽지랑가’이다.
● 작품 해설
이 작품은 신라 효소왕 때 죽지랑의 낭도인 득오가 죽지랑의 죽음을 애도하여 불렀다는 노래이다.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인 죽지랑을 찬양하면서 그를 그리는 마음이 해여 무심치 않다면, 저세상 어느 곳에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적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 이 노래는 죽지랑에 대한 사모의 정과 인생무상의 정서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주술성이나 종교적인 색채가 다른 작품에 비해 현저히 적다는 점에서, 순수 서정시에로 진일보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제망매가
● 원문
生死路隱
此矣有阿米 次肸伊遣
吾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遣去內尼叱古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一等隱枝良出古
去如隱處毛冬乎丁
阿也 彌陀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
● 구절 풀이
[생사 길은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사람이 한번 세상에 태어나면 죽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불교적 사생관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
누이의 죽음에 마주 선 시적 화자의 괴로운 심경이 나타난 부분이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누이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바람’과 ‘떨어지는 나뭇잎’의 비유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일반적 허무감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른’은 누이가 젊은 나이에 죽었음을 암시하며, ‘바람’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운명을, ‘떨어지는 나뭇잎’은 죽음을 나타낸다.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동기 간의 안타까운 정이 비유적으로 형상화된 부분이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이제껏 가까이 살아온 인연이 죽음 앞에서 허무하게 스러져 버렸다는 안타까운 탄식이 나타나 있다.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 도 닦아 기다리겠노라]
삶과 죽음에 대한 허무감과 이별의 슬픔을 불교적 신앙심으로 극복하려는 의지가 나타난 부분이다.
● 현대어 풀이
삶과 죽음의 길은 / 이(이승)에 있음에 머뭇거리고, / “나는 간다.”라는 말도 / 못 다 이르고 갔는가 /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 같은 나뭇가지(한 부모)에 나고서도 / (네가)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 아아, 극락에서 (너를)만나 볼 나는 / 불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다.
● 배경설화
월명사는 일찍이 높은 도력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경덕왕 19년인 760년,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서, 열흘이나 이와 같은 변괴가 계속되었다. 이에 왕의 명령을 받고, 월명사가 미륵불에게 산화공덕을 올리는 재식에 나아가 ‘도솔가’와 ‘산화가’를 지어 불렀더니, 미륵보살이 동자로 하림하고 변괴가 없어졌다 한다. 이 노래와 관련해서는,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위하여 재를 올리며 ‘제망매가’를 지어 불렀더니, 갑자기 바람이 일어나 재식에 사용된 지전을 서쪽으로 날려 보냈다고 한다.
● 작품해설
누이의 죽음을 가을에 떨어지는 나뭇잎에 비유하고, 오누이의 관계를 한 가지에서 나온 것으로 인식하여 묘사한 표현법은 이 작품의 뛰어난 문학성을 드러내 주는 부분이다. 시적 화자는 누이와 생사의 이별을 겪으면서 무상한 인생의 운명을 새삼 절감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불교적 믿음에 따라 재회의 그날까지 불도에 정진하면서 기다리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다. 이는 인간적 슬픔을 종교적 정신세계로 정화하여 극복하고자 하는 숭고한 정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제망매가’는 세 부분이 유기적으로 관련을 맺으면서도 시적 화자의 태도에서 각각 차이점이 나타난다. 시적 화자는 첫 부분에서 누이의 죽음에 대해 두려움과 애처로움을 피력하고 있다. 그만큼 정신적인 충격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누이의 죽음을 단순히 자기와 연민을 맺은 존재의 죽음으로 보기보다는 인간 보편의 문제로 승화시켜 통찰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의 ‘도 닦아 기다리겠노라.’에서 생사의 문제를 초극하려는 구도자의 의지적인 어조로 시상을 마무리하면서 누이의 죽음을 통해 얻게 된 생사의 문제에 대한 통찰력에 기대어 극락왕생의 의지를 드러낸다. 이처럼 누이의 죽음은 시적 화자의 정서적, 의지적 반응을 거쳐 종교적으로 승화되고 있다.
‘제망매가’의 표현상 특징을 살펴보면 정제되고 세련된 표현 기교를 사용하였고 뛰어난 비유를 통해 인간고(人間苦)를 종교적으로 승화하였다. 의식요의 성격을 띄며 5행과 8행 사이의 비유가 두드러진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남매’를 한 가지에 난 잎에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을 덧없이 부는 이른 바람에 떨어진 잎에, ‘누이의 죽음’을 한 가지에 났다가 떨어져 흩어지는 낙엽에 비유함으로써 누이의 요절에 대한 슬픔과 허무를 감각적으로 구상화하고 있다. 특히, ‘이른;’이라는 표현을 통해, 가을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지듯이 인간의 죽음도 필연적이라는 불교적 생사관이 높은 서정적 경지에 이르고 있다.
3. 찬기파랑가
● 원문
咽烏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攴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皃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磧惡希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肸逐內良齊
阿耶 栢史叱枝次高攴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 현대어 풀이.
흐느끼며 바라보매 /이슬 밝힌 달이/ 흰 구름 따라 떠간 언저리에/ 모래 가른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올시 수풀이여/ 일오내 자갈벌에서/ 낭이 지니시던/ 마음의 갓을 좇고 있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덮지 못할 고깔이여. <김완진 해독>
(구름 장막을)열어젖히며/ 나타난 달이/ 흰 구름 따라 (서쪽으로)가는 것 아니냐?/ 새파란 냇물에 기랑의 모습이 있구나./ 이로부터 냇가 조약돌에/ 낭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따르련다.<양주동 해독>
● 구절 풀이
[기랑의 모습이올시 수풀이요]
‘기 파랑의 모습이로구나.’하고 생각했는데 실은 어슴푸레한 저녁 강변의 수풀이었다.
[눈이라도 덮지 못할 고깔이여]
하늘 높이 솟은 잣 가지 모습이 고깔처럼 보이는 것을 노래하였다. 시적 화자의 추모하는 정이 집약된 구절로서, 신라의 이상적인 남성상인 기 파랑의 인격을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의 정신적 숭고함을 찬양하고 있다.
[구름 장막을]열어젖히며 나타난 달이 흰 구름 따라 (서쪽으로)가는 것 아니냐?]
여기에서 ‘흰 구름’은 삶의 무상함을 나타낸다. 시적화자는 기 파랑의 죽음에 낙심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그는 이와 같은 자신의 심정을 그대로 투사하여 달에게 ‘너도 흰 구름 좇아 아무런 의미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묻는 것이다.’
[새파란 냇물에 기랑의 모습이 있구나. 이로부터 냇가 조약돌에 낭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따르련다.]
달이 시적 화자에게 대답하는 말이다. 자신은 아무런 의미 없이 방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 파랑이 남기고 간 뜻을 따르고 실천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실의에 빠져 있는 시적 화자를 깨우치고 격려하는 말이며, 또한 이와 같은 삶의 자세를 가지라는 작가의 충고라고 할 수 있다.
● 배경설화
왕(경덕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 삼산의 신들이 간혹 나타나서 대궐 들에서 왕을 모셨다. 삼월 삼일에 왕은 귀정문의 누각 위에 나가서 측근자에게 말했다.
“누가 길에 나가서 위의 있는 스님 한 사람을 데리고 올 수 있겠소?”
이때 마침 모습이 깨끗한 고승이 이리저리 거닐면서 지나갔다. 측근 신하가 바라보고 그를 데리고 와서 뵈었다. 왕은 말했다.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스님이 아니다.”
왕은 그를 물리쳤다. 다시 승려 한 사람이 장삼을 입고 앵통을 걸머지고-혹은 삼태기를 걸머졌다 한다.- 남쪽에서 왔다. 왕은 기뻐하면서 그를 보더니 누각 위로 맞아들였다. 그 앵통 속을 보니 다구만 담겨 있었다.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저는 충담입니다.” / “어디서 오오?”
“제가 매양 삼월 삼일과 구월 구일이면 차를 다려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립니다. 오늘도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나에게도 차 한 사발 주겠소?”
승려는 이에 차를 다려서 왕에게 드렸는데 차의 맛이 이상하고 그 사발 안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겼다. 왕은 말했다.
“ 내 들으니 스님이 기파랑을 찬미한 노래가 그 뜻이 매우 높다 하니 과연 그러하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지어 주오.”
승려는 즉시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은 그를 아름다이 여겨 왕사로 봉하니 충담사는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 작품해설
‘제망매가’와 함께 표현 기교 및 서정성이 돋보이는 향가의 백미이다. 고도의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여 대상을 세련되게 표현하였고 ‘사뇌가’라는 명칭이 붙어 ‘찬기파랑 사뇌가’라고도 한다.
이 노래는 기 파랑이 화랑으로 지녔던 고고한 인격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자연물에 비겨 찬양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달, 냇물, 자갈, 잣나무’와 ‘눈(서리)’과 같은 자연물의 대조를 통해 그리움의 대상인 ‘기파랑’을 ‘하늘에 높이 뜬 달과 같은 숭고함’, ‘냇물과 같은 깨끗함’, ‘자갈과 같은 원만함’, ‘잣나무와 같은 시련을 이겨내는 꿋꿋함’을 지닌 존재로 형상화 하고 있다. 이처럼 이 노래는 시적 함축성이 뛰어난 시어들을 정제된 10줄의 시 형식 속에 담아 서정시로서의 문학적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또한 우리 고대 시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애상적인 면이 전혀 없으며, 미래 지향적이고 진취적인 기상과 의지가 돋보인다.
4. 혜성가
● 원문
舊理東尸汀叱 乾達婆矣游烏隱城叱兮良望良古 倭理叱軍置來叱多 烽燒邪隱邊也藪耶 三花矣岳音見賜烏尸聞古 月置入切爾數於將來尸波衣 道尸掃尸星利望良古 彗星也白反也人是有叱多 後句 達阿羅浮去伊叱等邪 此也友物比所音叱兮叱只有叱故
● 현대어 풀이
예전 동해 물가 건달파의 논 성을랑 바라보고, “왜군도 왓다!” 봉화(烽火)를 든 변방(邊方)이 있어라. 삼화(三花)의 산 구경 오심을 듣고 달도 부지런히 등불을 켜는데 길 쓸 별 바라보고 “혜성이여!” 사뢴 사람이 있구나. 아으 달은 저 아래로 떠 갔더라. 이보아 무슨 혜성이 있을꼬. (최철 풀이)
혜성가에 대한 해석은 다른 작품에 비해서 이견의 폭이 적은 편이다. 특히 전체의 의미 해석에서는 모든 논자들이 혜성의 출현을 상서로운 것으로 하고 있어서 의견들이 상당히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烽燒邪隱邊也藪耶’의 해독에서는 양주동은 ‘횃불을 올린 변방이 있어라’로 한 반면 김완진은 ‘횃불 올린 어여 수풀이여’로 풀이하고 있다. 김완진의 해독에서 특이한 것은 ‘邊也(변야)’를 고유명사로 본다는 것이다. 즉, 어여라는 수풀에서 횃불을 올렸다고 해석한 것이다.
또한 ‘達阿羅浮去伊叱等邪’의 해독에서는 양주동과 김완진의 해석이 차이가 있다. 양주동은 ‘달 아래 떠 갔더라’로 풀이한 반면, 김완진은 ‘달은 떠 가버렸더라’로 풀이하고 있어서 해독상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홍기문은 ‘드르르 떠 갔더라’로 해독하고 있다.
● 배경설화
제5 거열 랑(居烈郞), 제6 설처 랑(實處郞; 혹은 突處郞), 제7 보동 랑(寶同郞) 등 세 화랑의 무리가 풍악산으로 놀러 가려고 했다. 그 때 마침 혜성(慧星)이 심대성(心大星)을 범하였다. 낭도(郎徒)들은 이를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그 여행을 중지하였다. 이때에 융천사(融天寺)가 노래를 지어 부르자 별의 괴변은 즉시 사라지고, 마침 신라 땅에 상륙했던 왜구가 제 나라로 돌아가니 도리어 경사가 되었다. 임금이 기뻐하여 낭도(郎徒)들을 보내어 풍악에서 놀게 했다.
● 작품해설
이 노래는 세 화랑의 공덕을 칭송하여 부른 노래라는 견해도 있기는 하나, 혜성의 출현과 왜구의 침입을 막았다는 데에서 주사(呪詞)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노래의 속뜻은 탁월한 불교의 경지로서 본래가 청정무애(淸淨無碍)한 현상을 중생이 스스로 미망(迷妄)을 내어 현혹되고 고통받는 것으로 화엄(華嚴)의 경지, 선(禪)과 같은 경지를 말한 것이다.
신라 향가는 일연(一然)에 의하여 노래가 모아졌다는 사실 때문에 그의 취향과 사상이 노래 속에 어느 정도 들어갔으리라 생각된다. 일연이 신라의 후손이고 승려라는 점에서 볼 때 향가의 내용 역시 신라적이고 불교적인 면과 깊게 관련된다.
5. 원왕생가
● 원문
月下伊底亦,
西方念丁去賜里遣?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多可支白遣賜立,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支,
兩手集刀花乎白良願往生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阿邪,
此身遺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 현대어해석
달님이시여, 이제
서방까지 가려는가요?
무량수불(無量壽佛) 앞에
뉘우침 오램을 함씬 아룁니다.
다짐 깊은 부처님을 우러러 두 손을 모아,
원왕생(願往生) 원왕생(願往生)
그리워하는 사람 있다고 아뢰소서.
아아, 이 몸을 남겨 두고
사십팔원(四十八願)이 이루실까.
● 배경설화
문무왕(文武王) 때에 중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아 밤낮으로 약속하기를, “먼저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세계[安養]로 돌아가는 자는 모름지기 서로 알리도록 하지.”하였다. 광덕은 분황(芬皇) 서리(西里)에 숨어 살면서 짚신 만드는 것으로 업을 삼아 처자를 데리고 살았으며,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어느 날 해 그림자가 붉은빛을 띠고 소나무 그늘이 고요히 저물었는데, 창밖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살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
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가 보니 구름 밖에 천악(天樂) 소리가 들리고 밝은 빛이 땅에 드리웠다.
이튿날 광덕이 사는 곳을 찾아갔더니 광덕은 과연 죽어 있다. 이에 그의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호리(蒿里)를 마치고 부인에게 말했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어떻겠소.”
광덕의 아내도 좋다고 하고 드디어 그 집에 머물렀다. 밤에 잠을 자면서 관계하려 하자 부인은 거절하며 말했다.
“스님께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하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엄장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물었다.
“광덕도 이미 그러했거니 내 또한 어찌 안 되겠는가?”
“남편은 나와 함께 십여 년을 같이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거늘, 더구나 어찌 몸을 더럽히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서 한결같은 목소리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렀습니다. 또 혹은 십륙관(十六觀)을 만들어 미혹(迷惑)을 깨치고 달관(達觀)하여 밝은 달이 창에 비치면 때때로 그 빛에 올라 가부좌(跏趺坐)하였습니다. 정성을 기울임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가지 않으려고 한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체로 천릿길을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부터 알 수가 있는 것이니, 지금 스님의 하는 일은 동방으로 가는 것이지 서방으로 간다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엄장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물러나 그 길로 원효법사(元曉法師)의 처소로 가서 진요(津要)를 간곡하게 구했다. 원효는 삽관법을 만들어 그를 지도했다. 엄장은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스스로 꾸짖고, 한 마음으로 도를 닦으니 역시 서방정토로 가게 되었다. 그 부인은 바로 분황사의 계집종이니, 아마도 관음보살 십구응신(十九應身)의 하나였다. 광덕은 일찍이 이런 노래를 남겼다.
● 작품해설
신라 문무왕 때 광덕(廣德)이 지었다는 10구체 향가로서 신앙심을 달에 붙여서 부른 작품이다. ≪삼국유사≫ 권5 ‘광덕엄장조(廣德嚴莊條)’에 노래의 유래에 관한 배경설화와 향찰로 표기된 원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작자에 대해서는 광덕으로 보는 견해가 정설이나 광덕의 처, 원효, 민간 전승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 노래는 <도천수관음가 禱千手觀音歌>와 더불어 신라시대 기원가(祈願歌), 곧 기도하는 노래의 한 전형을 보여 준다. 기원가의 어법은 예배대상에 대한 청원이나 탄원 및 기구(祈求)·고백의 어법이 중심이 되는데, 이 작품도 바로 이러한 어법구조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예배대상은 무량수불로 되어 있고, 아미타신앙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무량수불은 곧 아미타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중요한 소재로 선택 된 ‘달’은 기도자(서정 자아)가 있는 현세와 극락정토인 서방을 잇는 중개자로 나타나 있다. 혹은 서방정토의 사자(使者)로서 상징적 의미를 띠고 있다.
노래의 첫 부분을 ‘달’이라는 대상의 초월적 힘에 기대어 시작하면서, 제3·4구에서 기도자는 자신의 청원을 달에게 부친다. 무량수불전에 자신의 뜻을 아뢰달라는 부탁이다.
그 소원이 무엇인지는 잠시 유보함으로써 긴장을 유발한다. 이어서 제5∼8구에 자신의 청원이 서방정토로 왕생하는 데 있음을 합장의 자세로 경건하게 아뢴다.
특히, 제5구는 아미타불에 대한 경배가 드러나고 있지만 ‘서원 깊으신’이라는 관형구로 제시되어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단순한 외경이 아니다. 아미타불이 법장보살(法藏菩薩)로 있을 때,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에게 맹세한 중생제도(衆生濟度)의 서원을 상기하도록 하여, 기도자 자신을 왕생하게 하는 일에 아미타불을 묶어 놓으려는 강한 의지까지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노래의 핵심, 곧 주제는 제7구에 집약되어 나타나 있다. 비록 함축적인 어휘로 표현되었지만 현실세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투영되었다고 보겠다. 이것은 세속적인 삶을 다 끝낸 뒤의 소망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현세를 초월하겠다는 절대절명의 청원으로 여겨진다.
맨 끝의 2구는 일종의 독백형식이면서 제5구에서부터 계속되어 온 기원의 연장이자 그 심화확대라는 견해와 의문형으로 끝내어 설의법(說疑法)의 가면을 썼으나 내면으로는 강한 명령법과 접맥되는 위협의 요소가 숨어 있으므로 주술적인 의지가 함축되어 있다는 일부 주장도 있다.
조건절을 수반한 반어의문문을 사용하고 있으며, 드러난 대로 읽으면 원망이라고 하겠으나 앞의 문맥과 연결시켜 읽으면 나의 왕생수행을 아미타불께 품신하여 나를 제도해 달라고 강하게 청하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때문에 신라인의 세계관이 불교와 샤머니즘이 습합한 것처럼, 이 노래 또한 달이라는 중개자를 통하여 주술적 어법을 빌려 정토왕생을 희원한 노래로 보기도 한다.
또 달을 대세지보살의 응현으로 보아 시적 자아가 서방정토에 왕생하고자 달로 응현된 대세지보살로 하여금 아미타불께 빨리 품신하여 주고, 왕생시켜 달라고 청원하는 노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원왕생가의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은 관련 설화의 관음보살과 함께 아미타 삼존을 완결한다.
이 작품은 신라불교가 귀족불교의 한계를 넘어서 일반 서민에까지 아미타신앙으로 확산되어 대중불교로 전환되는 배경으로, 현세의 고난을 이겨내고 내세의 극락으로 왕생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기도 형식으로 담은 기원적 서정가요로서, 주목되는 향가로 평가된다.
6. 원가
● 원문
物叱好支栢史,
秋察尸不冬爾屋支墮米,
汝於多支行齊敎因隱,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月羅理影支古理因淵之叱,
行尸浪, 阿叱沙矣以支如支,
兒史沙叱望阿乃,
世理都之叱逸烏隱第也
…後句 消失
● 현대어 풀이
뜰의 잣나무가
가을도 아닌데 시들지 아니하니
너처럼 가자고 하신
우러르던 얼굴 가시진 줄이야.
달 비치고 잠잠한 못에
흐르는 물결 슬퍼하듯이
용안이야 가끔 뵈온다 해도
세상은 왜 이리 싫기만 하누
…후구 소실
● 배경설화
효성왕(孝成王)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일이다.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더불어 궁정(宮庭)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면서 말했다.
“훗날 만약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자 신충이 일어나서 절했다. 몇 달 뒤에 효성왕이 왕위에 올라 공신(功臣)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잊고 차례에 넣지 않았다. 신충이 원망하여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갑자기 말라 버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했더니 나무에 그 노래가 붙어있었다. 왕은 크게 놀라서 말했다.
“정무(政務)가 복잡하고 바빠 각궁(角弓)을 거의 잊을 뻔했구나.”
이에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니 잣나무가 그제야 다시 살아났다.
이로써 신충에 대한 총애는 두 대에 걸쳐 두터웠었다. 경덕왕(景德王;효성왕의 아우) 22년 계묘(癸卯)에 신충은 두 친구와 서로 약속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악(南岳)에 들어갔다. 두 번을 불렀으나 나오지 아니하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는 왕을 위하여 단속사(斷俗寺)를 세우고 거기에 살았는데, 평생을 구학(丘壑)에서 마치면서 대왕의 복을 빌기를 원했으므로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 작품해설
신라 효성왕 때 신충(信忠)이 지은 10구체 향가. ≪삼국유사≫ 권5 ‘신충괘관조(信忠掛冠條)’에 배경설화와 함께 향찰 표기의 원문 8구가 전한다. 후구(後句)는 잃었다고 표기한 것으로 보아 10구체 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록문헌에 따르면, 효성왕이 아직 왕이 되기 전에 신충과 함께 궁정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면서 뒷날 왕위에 오르면 신충을 잊지 않겠노라고 잣나무를 두고 맹세하였다. 그런데 왕이 된 다음에는 그 일을 잊어버리자 신충이 이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걸었더니 나무가 누렇게 시들어 버렸다. 이 사실을 안 효성왕은 그때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신충을 등용하였다. 그랬더니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원가>는 주술적인 힘을 가진 노래로 <혜성가 彗星歌>와 같은 계열에 속한다. 즉, 왕과 잣나무가 동일시되어 은유관계가 성립하고, 잣나무에 작용하는 것은 곧 왕에게 작용하는 것이 된다. 잣나무에게 인간과 같은 생명을 부여하는 애니미즘적 심리와 자연계의 잣나무와 인간인 효성왕을 동일시하는 토테미즘의 심리가 투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래 자체에는 주술적 요소가 나타나 있지 않고 서정시적인 정조만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앞의 4구는 배경설화에 소개된 노래의 유래 설명과 완전히 일치한다. 즉, 효성왕이 작자에게 잣나무를 두고 맹세한 사건의 경위가 그대로 노래의 문맥에 표출되어 있다. 잣나무는 상록수이므로 가을이 되어도 낙엽이 지지 않는다. 그 불변의 상록수처럼 작자를 중용(重用)하겠다는 왕의 약속과는 달리 왕의 태도는 차가운 겨울처럼 돌변하였다. 제4구의 비유적 표현은 왕의 냉혹한 약속 위반을 의미한다. 이 부분까지는 왕의 태도변화에 대한 작자의 원망이 분출되어 있다.
뒤의 4구는 앞 4구의 결과로 인하여 고난에 처한 작자의 상황을 자탄하는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연못의 물결에 일그러지는 달 그림자, 물결에 밀려나는 모래로 작자의 고난에 찬 현실, 등용되지 못하고 소외당한 현실을 차원 높은 비유로 노래하였다. 그 밑바탕에는 물론 원망의 감정이 응어리져 있다. 왕을 존경하는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현실의 상황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처지’라고 절망으로 끝맺었다.
이처럼 작품 전체에 왕의 약속 위반에 대한 원망과 그로 인한 소외감 및 좌절·절망의 심경이 처절하게 분출되어 있다. 맨 끝구절은 의연한 체념으로도 볼 수 있고 소외된 자의 처절한 절망으로 볼 수도 있다. 후자의 관점을 따를 경우, 이러한 절망의 감정은 곧 원망과 접맥되어 있으며, 이 같은 원망의 언어가 주술력을 얻어 잣나무를 시들게 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까지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제작연대에 대하여 다소 논란이 있었다. 배경설화에 따르면 효성왕 원년(737)이나 효성왕 2년(738)이 되나 경덕왕대에 지었다는 주장도 있었다. 작자 신충의 생애에서 왕을 원망하는 노래를 지을 만한 절실한 시기는 효성왕 재위 때보다는 작자가 상대등의 직위에서 면직되던 경덕왕 22년(763) 이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면 배경설화와 노래가 일치하지 않으며, 효성왕 재위시에도 작자가 왕을 원망할 만한 상황이 주어졌고, 신충은 그 2년 뒤에 노래의 효험으로 중시(中侍)로 등용되었기에 효성왕대로 봄이 더욱 타당성을 갖는다.
이 작품은 효성왕을 시적 독자로 하였을 경우에 왕이 맹세를 깨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여, 우선 왕으로 하여금 맹세를 이행하도록 일차적으로 촉구한다. 다른 면으로는 그 보증자이고 징계주체인 잣나무로 하여금 보증과 징계의 책임을 지고 변색하여 왕이 이 변색을 보고 맹세를 이행하도록 다시 촉구하는 동시에 나무에 이상이 발생하며 왕권에 흉한 일이 일어난다는 속신(俗信)을 바탕으로 왕에게 다시 압박을 가하는 삼중의 장치를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감정을 표출하는 소재로 ‘잣’·‘물’·‘달’이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찬기파랑가 讚耆婆郎歌>와 동일하다. 그러나 후자에서 그것은 원형상징(原型象徵)으로 쓰였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상징어로서가 아니라 작자의 개인 서정을 노래하는 비유어로 쓰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원형상징으로 쓰일 경우에 그것은 풍요와 번영·영원을 상징하지만, 비유어로 쓰일 경우에 그러한 상징과는 무관하게 개인의 감정을 표출하는 기능만 수행할 뿐이다.
따라서 원형상징의 기능은 고대적(古代的)인 사유(思惟), 즉 전 논리(前論理)를 바탕으로 한 집단서정의 표출에 있지만 비유어의 기능은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한 개인 서정 표출에 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하여 신라 향가에서 원형상징의 해체와 개인 서정의 표출로 전환되는 시기를 이 작품의 출현에서 단서를 잡는 견해도 있다.
즉, 경덕왕대에 율령제가 실시되면서 한문화적(漢文化的)인 합리주의가 정치·문화적 기반이 되면서 원형상징은 해체를 맞고 합리적 사고에 입각한 개인 서정이 표출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러한 배경을 깔고 <원가>가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이 노래가 주술에 바탕을 둔 서정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사뇌가의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었으나, 개인의 감정을 차원 높게 승화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찬기파랑가>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7. 안민가
● 원문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
知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肹生
以支所音物生此肹湌惡支治良羅,
此地肹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國惡支持以, 支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國惡太平恨音叱如.
● 현대어 풀이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시는 어머니요
백성들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여기신다면
백성들이 사랑받는 것을 스스로 알리라.
꿈틀대며 살아가는 서민들이
사랑을 먹어 스스로 다스려져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하고 생각하면
나라가 보전(保全)되지 않을 것임을 알리라.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가 태평할 것이니라.
● 배경설화
당(唐)나라에서 『도덕경』 등을 보내오자 대왕(大王)이 예를 갖추어 이를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 되던 해에 오악(五岳)과 삼산신(三山神)들이 때때로 나타나서 대궐 뜰에서 왕을 모셨다. 3월 3일, 왕이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 나가서 좌우 신하들에게 일렀다.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중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
이때 마침 위의 있고 깨끗한 고승(高僧) 한 사람이 길에서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신하들이 이 중을 왕에게로 데리고 오니, 왕이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중이 아니다.”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다시 중 한 사람이 있는데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는데, 왕이 보고 기뻐하여 누각 위로 영접했다.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었다. 왕은 물었다.
“그대는 대체 누구요?”
“소승(小僧)은 충담(忠談)이라고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소승은 3월 3일과 9월 9일에는 차를 달여서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께 드리는데, 지금도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나에게도 그 차를 한 잔 나누어 주겠는가?”
중이 이내 차를 달여 드리니 차맛이 이상하고 찻잔 속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겼다. 왕이 다시 물었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스님이 기파랑(耆婆郞)을 찬미(讚美)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무척 고상(高尙)하다고 하니 그 말이 과연 옳은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주시오.”
충담은 이내 왕의 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치니 왕은 아름답게 여겼다. 왕은 그를 왕사(王師)로 봉했으나 충담은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 작품해설
경덕왕 대에 충담사가 치국(治國)과 안민(安民)의 도를 노래한 10구체 향가이며 불교적(佛敎的), 유교적(儒敎的), 주술적(呪術的) 성격을 모두 지녔다.
「안민가」를 창작할 당시의 상황은 각종 천재지변이 민생을 위협했을 뿐 아니라, 김양상 일파가 등장하여 왕권을 위협하는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경덕왕은 백성의 처지를 바탕으로 당면한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충담사에게 부탁해 「안민가」를 지었다.
「안민가」는 정치ㆍ사회적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그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임금의 요구를 받고 지어졌기 때문에 예술성보다는 목적성(目的性)과 교훈성(敎訓性)이 강한 작품이 되었다.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비교해보았을 때 안민가는 나라의 평안을 위해서 왕의 요청에 따라 임금, 신하, 백성의 도리를 노래한 공적인 동기에 의해 창작되었고 치국에 대한 조언을 하는 노래이므로, 조건문으로 존대하면서 충고를 보이는 교훈적이고 단정적인 말투로 지어졌다. 찬기파랑가는 존경하고 사모하던 화랑의 죽음을 추모하고, 그의 인품을 찬양하기 위한 사적인 동기에 의해 창작되었다. 찬기파랑가는 인품을 추모하는 노래이므로 영탄, 찬양, 소망의 어투로 지어졌다.
8. 우적가
● 원문
自矣心米
皃史毛達只將來呑隱日
遠鳥逸□□過出知遣
今呑藪未 去遣省如
但非乎隱焉破□主
次弗□史內於都還於尸朗也
此兵物叱沙過乎
好尸曰沙也內乎呑尼
阿耶 唯只伊吾音之叱恨隱陵隱
安支尙宅都乎隱以多.
● 현대어 풀이
제 마음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하고
어둡고 어지럽던 날을 멀리 지나서
이제부턴 숨어 지내러 가고 있었지.
어찌 하마 그릇된 파계주를
두려워할 꼬락서니에 다시 돌아가랴.
이 칼을 지내고는
좋은 날 샐 것이 분명한데
아아, 오직 요만큼한 선으로는
淨土를 못 맞을까 걱정이로다.
● 배경설화
중 영재(永才)는 성품이 익살스럽고 재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향가(鄕歌)를 잘했다. 만년에 장차 남악(南岳)에 은거하려고 대현령(大峴嶺)에 이르렀을 때 도둑 60여 명을 만났다. 도둑들이 그를 해치려 했으나, 영재는 칼날 앞에 섰어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온화하게 대하였다. 도둑들이 이상히 여겨 그 이름을 물으니 영재라고 대답했다. 도둑들이 평소에 그 이름을 들었으므로 이에 노래를 짓게 했다.
도둑들은 그 노래에 감동되어 비단 2필을 그에게 주니 영재는 웃으면서 사양하여 말했다. “재물이 지옥에 가는 근본임을 알고 장차 궁벽한 산중으로 피해 가서 일생을 보내려 하는데, 내 어찌 감히 이것을 받겠는가.” 이에 땅에 던지니 도둑들은 다시 그 말에 감동되어 가졌던 칼과 창을 버리고 머리를 깎고 영재의 제자가 되어 함께 지리산(智異山)에 숨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영재의 나이 거의 90살이었으니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시대이다.
● 작품해설
신라 38대 원성왕대(785-799)에 승려 영재(永才)가 지은 향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三國遺事≫ 권5 영재우적조(永才遇賊條)에 전하고 있다. 영재가 산중에서 도적을 만나 이 노래를 부르니, 도적들이 모두 회개하였다고 한다. 시가의 형식은 10구체로 되어 있다. 시가와 함께 전하고 있는 산문기록에 의하면, 승려인 영재는 천성이 익살스럽고 재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향가를 아주 잘 불렀다고 한다. 만년에 장차 남악(南岳)에 은거하려고 대현령(大峴嶺)이라는 고개를 지나다가 도적 60여 인을 만나게 되었다. 도적들이 해치려고 하여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태연했다. 도적이 이상히 여겨 그 이름을 묻자 영재라고 대답하니, 도적들도 평소에 그의 이름을 들은 바가 있어 노래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
영재가 부른 노래에 감동하여 비단 두 끝을 주니, 영재가 웃으며 말하기를, “재물이 지옥에 가는 근본인 것을 알고 장차 깊은 산으로 피해 일생을 마치려는 테에 어떻게 이것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라는 그의 말에 감화되어 도적들 모두 무기를 버리고, 또 머리를 깍고 영재의 도제되어 지리산에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작품은 살아가며 무용(無用)한 일을 하는 중생들에게 일깨움을 주고, 모든 악업(惡業)을 그치고 불도를 닦아 극락정토에 들기를 권유하는 불교적 불성론(佛性論)과 정토사상(淨土思想)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적 수행을 권하고, 나아가 그 덕업을 기리는 성격의 노래이다. 내용상 3개의 시적 단락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시가의 화자는 첫째 단락을 통하여 번뇌와 망념의 세계인 무명(無明)으로부터 벗어나 이제 수행을 위하여 은거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고 술회하듯이 노래하고 있다. 이어서 화자는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도적들에게로 돌리어, 이들을 “오직 잘못된 파계주(破戒主)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겨눈 칼날에 한번 찔리어 죽으면, 이내 좋은 곳에 왕생(往生)하게 될 것이라고,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종교적 의연함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도적들이 겨눈 칼을 바라보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음을 역력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다만 죽음에 대한 불구(不懼)만이 아니라, ‘죽음’은 곧 왕생이라는 ‘기쁨’으로까지 승화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어서 마지막 단락인 후구에 이르러 “아 아 오직 요만한 선(善)은 아니 새 집이 되니이다.”라고 노래한다.
이로 도적들이 나를 죽임으로 해서 결과적으로는 내가 왕생을 할 수 있게 하는 공덕(功德)을 쌓는 것이 되겠지마는, 그러한 것은 결국 최선의 선택은 되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도적들에게 올바른 덕행의 길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는 시적 의도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노래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마지막 단락에서 보여 주고 있는 시적 아이러니와 기지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높은 경지에서나 이룰 수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9. 도천수관음가
● 원문
膝肹古召旀,
二尸掌音毛乎支內良.
千手觀音叱前良中,
祈以支白屋尸置內乎多,
千隱手口叱千隱目肹.
一等下叱放一等肹除惡支,
二于萬隱吾羅,
一等沙隱賜以古只內乎叱等.
邪阿邪也, 吾良遺知支賜尸等焉,
放冬矣用屋尸慈悲也根古.
● 현대어 풀이
무릎을 곧추며
두 손바닥 모으와
천수관음 앞에 비옵나이다.
일천 손에 일천 눈 중
하나를 놓아, 하나를 덜어
둘 다 없는 내 몸이오니
하나만 가만히 고쳐 주옵소서.
아아, 임은 예사로운 듯 베푸시는데
내게 주옵시는 큰 자비는 너무 커서 말 못하지 못하겠습니다.
● 배경설화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희명(希明)이라는 여자의 아이가, 태어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芬皇寺)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린 천수관음(千手觀音) 앞에 나아갔다. 그녀가 눈 먼 아이를 시켜 이 노래를 부르고 빌게 했더니, 드디어 멀었던 아이의 눈이 떠졌다.
● 작품해설
신라 향가(響歌)의 하나. 신라 경덕왕 때 희명(希明)이 지어 《삼국유사》권3 분황사천수대비맹아득안조(芬皇寺千手大悲盲兒得眼條)에 전한다. 〈천수관음가〉 · 〈천수대비가(千手大悲歌)〉 ·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 · 〈맹아득안가(盲兒得眼歌)〉 등이라고도한다. 경주 한기리의 여인 희명의 아들이 생후 다섯 해 만에 갑자기 눈이 멀게 되자 희명이 분황사 좌전(左殿)에 있는 천수대비의 벽화 앞에서 아이로 하여금 이 노래를 부르게 하여 마침내 밝음을 얻었다는 유래가 있다. 전체 노래가 10구절로 나누어지므로 흔히 십구체(十句體) 향가로 인정받고 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膝肹古召尸 二尸掌音毛乎支内良 千手觀音叱前良中 析以支白屋尸置内平多 千隱手口叱千隱目肟一等下叱放一等肹除惡支二千萬隱吾羅 一等沙隱賜以古只内平叱等邪阿牙也 吾良遺知支賜尸等焉 放冬矣用屋尸慈悲也根古(무루플 고조며 둘 바당 모호누아 千手觀音ㅅ前아 비올 두누오다 즈믄 손ㅅ 즈문 눈흘 그 고티누옷다라 아으 나애 기티샬 노慈悲여 큰고)."(梁柱東 해독)
향찰(鄕札)로 표기된 내용의 해독이 연구자에 따라 다소 틀리기는 하지만 대체로 천수천안(千手千眼 : 천 개의 손과 그 손바닥마다 박혀 있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천수관음앞에 합장하고 앉아 "두 눈이 없는 내게 눈을 주신다면 그 자비로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하는 기원의 노래라는 데에는 일치한다. 원전의 "영아작가(令兒作歌)"라는 대목에 대한 풀이에 따라 이 노래의 작자를 희명의 아들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이 노래를 향찬(鄕讃)으로 본다면 향찬의 전통적인 창법에 따라 희명이 부른 것을 그 아들이 따라 불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노래는 명령법이나 강제의 요소에 의존하는 주술가(呪術歌)와는 달리 종교적 신심(信心)으로써 신격(神格)을 환기하고, 나아가 초월적인 신격에 의하여 자신이 구제되기를 기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 서정시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10 보현십종원왕가
● 원문
以心爲筆盡空王
瞻拜唯應遍十方
一一塵塵諸佛國
重重刹刹衆尊堂
見聞自覺多生遠
禮敬寧辭浩劫長
身體語言兼意業
總无疲厭此爲常
「禮敬諸佛歌」
● 현대어 풀이
마음의 붓으로 그린 부처님께
절하는 이 내 몸 법계의 끝까지 이르러라
티끌마다 부처님의 절이요
절마다 모시옵는 당이로다.
법계에 가득 찬 부처님
구세 다하도록 절하고 싶어라.
아, 몸과 말과 뜻에 싫은 생각 없이
이에 부지런히 사무치리.
● 작품해설
고려 광종 연간에 균여(均如)가 지은 향가. 보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往歌)·원왕가(願往歌)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원왕가(願王歌)’만이 ≪균여전≫의 문헌 명칭이고, 나머지는 ≪균여전≫의 ‘보현십종원왕에 의거하여 노래 11장을 지었다(依普賢十種願王 著歌十一章)’는 기록에 의한 후대의 명명이다.
작품은 고려대장경 보판(補板) ≪석화엄교분기원통초 釋華嚴敎分記圓通抄≫ 권10 끝에 부록으로 실린 <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균여전병서 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並序>의 제7 가행화세분(歌行化世分)에 향찰로 표기되어 전한다.
창작연대는 963∼967년 사이로 여러 설이 있다. 균여는 ≪균여전≫에 인용된 글에서 ≪화엄경≫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의 어려운 종취(宗趣)를 향가를 빌려 중생을 교화하고자 한다고 창작동기를 밝히고 있다. 전체 11수로 되어 있으며, 각 수 모두가 11분절로 띄어져 있다. 10구체로 보는 것이 통설이나, 그 띄어쓰기를 존중하여 11구체라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
형식상 매우 정연한 형태를 보여 주고 있는데, 제1구는 매우 짧으며, 제9구 앞에는 감탄사를 수반하는 것이 특성이다. 각 작품 모두가 의미단위로는 세 단락이다. 이들 세 단락을 이루는 구수(句數)는 4구 또는 2구이며, 작품은 4·4·2의 구수로 구성되어 있다. 이 4·4·2의 3단위는 ≪균여전≫에서 <원왕가> 또는 향가의 형식을 말해 주는 3구육명(三句六名)의 3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며, 6명의 해석에는 서로 다른 견해들이 있지만, 3구6명의 구와 명은 불경에서 이야기하는 명구문(名句文)의 명과 구라는 데는 거의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체재는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기초하여, 그 10행원의 순서를 그대로 하고, 제목은 ‘○○○○품’을 ‘○○○○가’로 고치고 그 밖의 다른 글자는 거의 그대로 쓰면서 10수의 향가를 창작한 다음에, <총결무진가 總結无盡歌>를 더하여, 전체 11수로 짜고 있다.
<칭찬여래가 稱讚如來歌>는 여래불의 공덕을 칭송하는 노래로, 칭송자의 혀에 무한한 능력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광수공양가 廣修供養歌>는 넓게 여러 가지 공양을 모두 행하겠다는 내용으로, 그 많은 공양 중에서도 물질공양이 아닌 몸으로 하는 법공양이 으뜸임을 강조한다.
<참회업장가 懺悔業障歌>는 유일하게 보현행원품의 참제업장(懺除業障)이라는 제목을 고친 노래로, 그 내용은 오늘의 참회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수희공덕가 隨喜功德歌>는 어느 누구의 공덕이라도 이는 곧 나의 공덕이 되니, 그 모든 공덕을 따라 기뻐하겠다고 한 노래이다.
<청전법륜가 請轉法輪歌>는 법륜(중생의 악을 부수는 설법)을 굴리도록 청하는 노래로, 그 내용은 부처님의 은혜로 중생이 깨달은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 준다. <청불주세가 請佛住世歌>는 부처님이 비록 이 세상과 인연을 다하여 서방으로 가려고 할지라도 가지 말고 이 세상에 계속 머물면서 중생을 구제해 주도록 갈구하는 내용이다.
<상수불학가 常隨佛學歌>는 항상 부처님을 따라서 배우겠다는 노래로, 부처님이 닦으신 어렵고 괴로운 수행을 좇고자 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다짐한다. <항순중생가 恒順衆生歌>는 항상 중생을 따르겠다는 내용으로, 부처님도 중생으로 뿌리를 삼으셨으니 자신도 그렇게 중생을 따르겠다고 노래하고 있으며, <보개회향가 普皆廻向歌>는 자신이 닦은 모든 공덕의 선을 중생에게 돌려, 중생에도 미혹한 무리가 없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총결무진가>는 앞의 10수를 묶어 결론짓는 노래로, 생계(生界) 다하면 자신이 바라는 바도 다할 날이 있으리니, 보현행원만을 열심히 행하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이다.
이 내용들은 작품별 유형으로 보면, <예경제불가>·<칭찬여래가>·<광수공양가>·<참회업장가>·<수희공덕가> 등이 속하는 바람(1)↔바람(2)→맹서의 유형, <청전법륜가>이 내용들은 작품별 유형으로 보면, <예경제불가><칭찬여래가><광수공양가><참회업장가><수희공덕가> 등이 속하는 바람(1)↔바람(2)→맹서의 유형, <청전법륜가>·<청불주세가> 등이 속하는 맹서→바람(1)↔바람(2)의 유형, <상수불학가>·<항순중생가>·<보개회향가> 등이 속하는 바람→맹서(1)↔맹서(2)의 유형, <총결무진가>가 속하는 (바람→)맹서(1)→(바람→)맹서(2)→(바람→)맹서(3)의 유형 등으로 나뉜다.
불교가요로 사뇌가 형식의 정착에 기여하고 있으며, 향가의 전성기를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작품이다. 작품의 표기상 한자어가 많이 보이는데, 언어의 표기에서 의미를 나타내는 어근과 어간에는 한문을 주로 쓰고, 문법적 기능을 나타내는 어미에는 향찰을 주로 쓰고 있다.
이 노래는 병든 자가 암송하여 병이 나았고, 사람들의 입으로 전파되어 담벼락에 종종 쓰였다는 ≪균여전≫의 기록으로 보아 주력과 신이한 영험을 지녔던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작품의 내용은 ≪보현행원품≫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었으나, 상당히 많은 측면에서 그 내용을 하향적으로 변개하여 조절한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즉 ,≪보현행원품≫에서 발화자는 보현보살이고, 청자는 상근기(上根機)에 속하고 의근(意根)과 신근(信根) 등의 오근(五根)이 발달한 자인데, 이를 <원왕가>에서는 발화자는 균여로, 청자는 하근기(下根機)에 속하고, 낙근(樂根)·희근(喜根)·고근(苦根) 등의 오수(五受)가 발달한 자로 각각 바꾸었다. ≪보현행원품≫은 체내방편(體內方便)을 이용하는데, <원왕가>는 체외방편(體外方便)으로 바꾸었으며, ≪보현행원품≫의 원의 대상, 서원자의 위치, 서원 행위 등을 모두 <원왕가>에서는 하향조절을 하였다.
균여와 같은 시대 사람이며 그의 <원왕가>를 한문으로 번역한 최행귀(崔行歸)는 균여의 향가를 중국의 사부(詞賦)를 능가하는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송나라의 군신들에게까지 전파되어 호평을 받았으며, 그들은 균여를 일컬어 “진실로 한 부처가 세상에 오신 것(眞一佛出世)”이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고전시가론] 성기옥, 손종흠 공저
[네이버 지식백과] (네이버고전문학사전, 2004. 2. 25., 권영민)
[네이버 지식백과]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외국인을 위한 한국고전문학사, 2010. 1. 29., 배규범, 주옥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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