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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비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166쪽에서부터 212쪽까지)

by 嘉 山 2020. 6. 18.

소포클레스의 작품인 [오이디푸스 왕]은 고대에서 가장 유명했던 비극이다. 이 작품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이 작품을 비극의 대표로 이야기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이디푸스 왕]은 테바이 왕가에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는 태어나게 되면 안 된다는 신탁에 발목에 쇠꼬챙이가 꿰어진 채 산에 버려진다. 다행히 다른 사람 손에 구해져서 이웃나라 왕의 아들로 지내다가 자신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델포이 신전에서 자신의 진짜 부모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고자 하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라는 끔찍한 신탁 내용에 자신이 지내던 곳과는 반대방향으로 길을 떠난다. 그러다 지나가는 일행과 싸움이 나고, 오이디푸스는 자기에게 폭력을 가한 행인 무리를 모두 죽인다. 이후 스핑크스를 만나 수수께끼를 풀고, 과부가 된 왕비와 결혼을 하고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다가 시간이 지나 모든 일이 드러나서, 어머니이자 아내는 자살을 하고, 그는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채 방랑의 길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을 살펴보면 큰 줄기의 몇몇 특징이 보이는데 첫 번째로 ‘수사 극’이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수사 극’이란 형식으로 이야기를 펼침으로써 갑자기 이야기 중간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수사의 진전에 따라 과거가 드러나고 미래가 나오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막 도착한 크레온에게 이 것 저것을 물으며 사건의 개요를 파악하며 수사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인다. 과거 왕이 죽은 내용에 대해 물어보는데 그 질문은 매우 조직적이고 핵심적인 부분만 질문을 한다.

여기서 크레온과 오이디푸스가 라오스 일행을 죽인 도적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크레온은 ‘도적들’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오이디푸스는 ‘도적’이라는 다수표현을 쓰는데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범인으로 생각해서, 이미 크레온을 범인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또는 오이디푸스의 계산이 무너지고, 인간의 합리성이 무력화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시각 등 다양하게 해석이 된다. 여기 내용에서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은 혈통에 의한 왕위계승이 아니라 자력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기 때문에 정치적 의심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둘째, 비극에서는 아이러니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1) 대개는 등장인물이, 때로는 자신은 반어법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떤 진리를 발설할 때 생기는 게 아이러니인데 이는 관객이 등장인물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등장인물과 관객의 지식의 격차에 의해 발생하는 특별한 아이러니를 ‘비극적 아이러니’라고 한다. (172쪽)

실제로도 이야기 전반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오이디푸스의 말을 보면 ‘자기 발등 찍는 소리를 계속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이러한 부분이 비극적 아이러니로 생각된다.

셋째, 시인과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시간을 잘 활용한다. 왕에게 탄원하러 왔던 무리가 나가고 극중에 합창단이 등장하여 노래하는 부분이 있다. 그들이 들어와 노래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동안 탄원 내용에 대해 고민하고 거기에 대해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조치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또 한 번 왕은 정치적 의혹으로 크레온이 모든 일의 배후라고 생각을 하였을 때에도 합창단이 노래하는 동안 그를 응징할 구체적 방안까지 생각을 해 놓았다.

즉, 합창단의 등장으로 주인공은 자신의 생각을 확장시키고 결정하여 주변에 이야기는 입체적인 인물로 보이게 되고, 극중 장면은 자연스럽게 전환이 되고,오이디푸스의 생각의 변화, 진실이 점점 밝혀짐에 따른 점차적인 지위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넷째,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의 삶이 핵심이다. 오이디푸스에게 나의 친부모가 누구인가?는 평생의 한이었다. 처음 시작은 왕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춰 예언자와의 말다툼이 진행되었다면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경험과 겹치는 부분을 인지하고 ‘내가 그 살인자인가?’라는 질문에 빠져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그의 측정하는 인간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여기서 오이디푸스는 혹시나, 설마와 같은 불안에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싶어하지만 이오카스테와의 대화를 통해 과거사가 드러나게 된다.

다섯째, 신탁과 운명 그리고 우연

둘은 신탁의 내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불안해하는 오이디푸스를 위해 이오카스테는 제물을 들고 나와 아폴론 신상에 기도하는 사이 기도에 대한 응답처럼 코린토스의 사자가 온다. 코린토스의 사자에게 보답을 약속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이 작품이 모든 사건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촘촘하게 짜여져 있는 가운데 코린토스의 사자는 연관성이 다소 떨어진다. 이는 코린토스의 사자 이야기는 우연적으로 여기에 끼어들게 된 것을 의미한다.

운명에 순응해서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구와 행동에 따라 움직였으나 이는 결과적으로 신들의 예언과 일치하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운명극이 아니지만 주인공이 신탁을 피하려 발버둥을 쳐도 결국엔 신들의 예언과 일치하게 되는 결말이 운명극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여섯째,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가 눈을 찌른 후 결말 부분이 굉장히 길게 나온다. 오이디푸스는 거의 나오지 않고 서사시적 보고를 통해 설명이 된다. 그 이유는 옛날 극장이 요즘과는 다른 구조로 이루어져있기에 끝내는 방식 현대와는 다르고 긴 끝마침은 감정의 정돈하는 장치이다. 내가 만약 이 부분이 없는 극을 보았다면 감정 선이 뚝 끊겨서 마음 한 덩어리가 뎅강 조각난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정말 끝나고 감정을 추스르기가 힘들게 극이 끝나도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힘든 느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엔딩 크레딧이 있어 감정을 추스를 수 있지만 옛 연극에는 그런 장치가 없기 때문에 배우와 합창단은 관객의 감정이 충분히 정돈될 때까지 동행하는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가 그 재앙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그의 활력과 기민함, 추진력을 잃지 않고 운명의 주인은 인간 자신임을 보여준다.

자신의 눈을 찌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은 눈을 찌른 행동이 순간의 충동이 아닌 운명의 주인은 자신이라는 선언을 의미한다. 크레온이 찾아오고 그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데 이 부분은 그에게 새롭게 밝아오는 지혜의 빛을 확인하고 자신을 키타이론 산으로 보내주기를 요구하는 부분은 자기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다. 2)합창단은 오이디푸스의 옛 행복과 현재의 재앙을 비교하면서 삶이 끝나기까지는 그 누구도 함부로 행복하다 여기지 말자고 노래한다. 형식적으로는 이것이 작품의 결론이다.(210쪽)

3)비극의 진행방식은 한 인물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떨어지는 것을 규정한다. 시인은 인간사를 주관하고 예지하는 신들의 위대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위대함을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다. (210쪽)

<독후감>

책을 읽다가 대본이 있는 것 같아 찾아서 읽어보았다. 먼저 대본을 읽고 다시 책을 읽으니 찾아서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본을 읽는데 “아, 정말 잘 쓰여진 글이다.”라는 생각을 하던 중 나도 모르게 당연히 현대작품이라고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책에서도 나왔지만 작품 전체적으로 물 흐르듯이 매끄럽고 읽으면서도 점점 빠져들게 되고 특히 군더더기 없이 핵심만 질문하고 답하는 장면은 정말 깔끔하다.

수 천년 전에 지어진 내용이지만 최근에 지어진 내용이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굉장히 깔끔해서 읽는 동안 고대 비극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을 정도이다.

우리가 평소에 오이디푸스에 관한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일반적인 ‘신화’를 적어 놓은 이야기책에서 접할 수 있는데, 이와 달리 이 작품은 극의 절정에서 밝혀지는 과거, 진실 앞에서 이루어지는 극중 인물들의 행보들을 보면서 더욱 감정적으로 크게 와 닿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읽으면서도 내 심장이 철렁하고 안타까움, 속상함, 대단함 등 다양한 감정들이 더 깊게 느껴졌다.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을 바라보고 생각하며 순리대로가 아닌 위대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늘 생각했다.

신화의 세계를 공부하며 광대한 세계 속의 울창한 신들의 숲을 탐닉하는 기쁨을 맛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삶을 영위해 나가며 끝없이 풀리지 않는 의문들, 스핑크스 수수께끼의 정답을 맞춘 오이디푸스의 지혜와 행복의 절정에서 “나는 누구인가?” 한 꺼풀 한 꺼풀 벗겨지는 비극의 진실 앞에서 외면하지 않고 의연한 자세로 자신을 찾아나서는 오이디푸스! 쇠꼬챙이에 발이 찔린 채 버려졌던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신탁을 들으러 가던 중 아들에게 살해당한 아버지, 아들과 결혼한 사실을 알고 죽음을 선택한 어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비극의 비밀까지 감당하여야 하는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장님이 되어 고행의 길을 선택한다. 그의 생애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며 슬픔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모든 것을 지배하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지배했던 것들도 평생 당신을 따르지는 않았으니까요!” 모든 것을 잃은 오이디푸스의 처량한 신세를 보통 사람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크레온이 딸들과 떨어지지 않으려는 오이디푸스에게 한 말이 가슴을 울린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경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대응하며 방황과 좌절, 고독과 소외, 무의미한 불안과 고통, 두려움 속에서 정처 없이 바람에 표류하는 조각배처럼 삶에 휩쓸리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라 조금이라도 힘들면 진실 앞에서 가끔은 고개를 돌려가며 순간순간 쾌락의 안이함도 추구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그 불행 속에서 더욱 빛나는 내면의 힘, 그 재앙 속에서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려는 어떤 높이를 보여주려는 것, 완벽한 존재로 영원한 행복 속에 사는 신들의 세계에서 인간사를 주관하고 예지하는 신들의 위대함, 그와 더불어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위대함도 보여 주었기에 최고의 걸작이라 생각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리스의 신탁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남긴 경구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에 적힌 말이다. 인간은 힘들고 나약해질 때 누군가에게 의지하고자 한다.

‘신탁’ 기도자의 요청에 의한 응답, 신의 메시지, 라이오스 왕이 신탁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식을 버리지 않았다면 오이디푸스가 홧김에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인간의 나약함이 만들어낸 비극 중의 비극 자식을 버리는 부모, 아버지를 죽인 아들, 어머니를 아내로 삼아 자식을 낳아 기르는 천륜에 위배되는 행위. 지혜로운 오이디푸스에게 어떠한 이익도 줄 수 없는 끔찍한 재앙이 극의 비극을 더한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찔러 검붉은 피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자신의 비운을 한탄하고 절규하는 장면은 비극의 극치를 보여 준다.

자신도 모르게 천륜을 거스르는 막중한 죄를 짓고 고귀한 국왕에서

죄 많은 맹인으로 보내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그린 이 작품은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기능을 연민과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사건을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는 것으로 해석 하였다.

소리 내어 실컷 울고 나면 감정이 정화 되어 마음의 평정을 찾는다.

신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운명의 잔혹함과 그 운명을 견뎌내야 하는 인간의 고통과 비극적 상황을 마주 했을 때 과연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대처할까?

어릴 적 우연치 않게 들은 점쟁이의 말 “범띠에 시까지 범이 활동할 시기이니 날 팔아야 한다.”는 소리에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아 몇날 며칠을 대성통곡했었다.

차차 자라면서 그 ‘팔아야한다’는 의미가 무슨 뜻인지를 깨달았으며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순간순간 그 점쟁이의 말을 떠올린다.

삶이 끝나기까지는 그 누구도 행복하다고만 말할 수 없으리라. ‘나’자신을 깊이 깨닫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

즉, 인격적인 차원에서 자신과의 만남, ‘나’를 의식하고, ‘나’를 인정하고 나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다. 인간 운명의 설명할 길 없는 신비하고 보석 같은 작품을 읽고 가슴 가득 뿌듯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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