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며느리라는 이름
<<국제시장>> 영화를 보았다. 한국 전쟁을 지나 가족을 위해 굳세게 살아가는 장남의 이야기였다. "꼭 당신 이야기 같아요." 남편의 눈동자가 살포시 젖어 든다. 대학 시절 만난 남편은 너무나 가난해서 야반도주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큰 아픔이었는지 동생들은 절대 고생시키지 않으리라는 각오가 대단했다. 진심을 다해서 말하는 그 남자를 돕고 싶었다. 결혼할 때 시동생들은 남편과 나이 차이가 많았다. 초등학교 1학년, 3학년, 5학년, 중 1이었다. 엄마는 대성통곡했다. 하나뿐인 딸이 자신과 닮은 길을 가겠다고 떠나는 게 안타깝고 원망스러웠으리라.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었다.
대가족 속에서 물 마를 날 없는 손은 주부습진으로 쩍쩍 갈라졌다. 학교 급식이 없던 시절이라 도시락을 7 ~ 8개씩 쌌다. 반찬 값도 일일이 어머님께 타서 썼다. 빚이 많았던 부모님 가게는 남편이 합류하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업종을 바꾸면서 어머님이 장사를 못 하게 되었다. 큰딸이 아홉 살 아들은 갓 돌이었다. 자식들이 눈에 밟혀 하기 싫다고 해도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 밤낮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동생들도 가르쳐서 결혼할 때가 되었다. 남편이 집 세채를 샀었는데 동생들에게 한 채씩 주자고 아버님이 말했다.
남편은 나중에 상가를 지으려는 생각이었지만 아버님 말씀에 따랐다. 동생들을 결혼시키고 나니 아버님은 편하게 살고 싶다고 분가하겠다고 했다. "우리 애들이 아직 어리니 조금만 더 도와주세요." 남편은 울면서 매달렸다. 소용없었다. 집 가까이에 조그만 아파트를 사서 부모님도 분가시켰다. 아이엠에프(IMF) 사태가 오고 사정이 어려웠다. 딸 셋이 한꺼번에 대학을 다녔다. 용돈도 넉넉히 못 주고 어렵게 공부한 얘기를 할 때는 마음이 아팠다. 그 와중에 남편은 내 속을 긁었다. 나 때문에 딸을 많이 낳아서 고생을 시킨다고, 어이가 없었다. 나는 말했다. "당신은 결혼을 하지 말아야 했다. 항상 처자식보다 부모 형제가 우선이었다. 나와 자식들은 피해자야."
우리나라에는 장자 우대 차등 상속제라는 게 있다. 부유한 계층의 장자는 물려받을 게 많고 책임도 무겁다. 하지만 가난한 집 장자는 책임만 무겁다. 제사나 부모 모시기에 장자가 책임을 진다고 하지만 실상은 아내의 몸으로 해결해야 한다. 맏아들 우대주의는 성차별일 뿐만 아니라 서열 차별이어서 가족 갈등도 불러온다. 미풍양속이라 보기엔 너무나 문제가 많은 제도이다. 우리사회에서 결혼은 사위보다는 며느리가 된다는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성차별 없는 사회란 서로가 편안하게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누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짐을 나눌 수 있는 사회라 생각한다. 고정관념에 스스로를 맞춰서 현실에서 일어나는 여러 변화들을 무시하면서 힘들어하지 말고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관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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