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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완주)

제 2 구간 성삼재 - 여원재

by 嘉 山 2012. 2. 27.

 

◎ 일시 : 2012년 2월 25일 02시 목포 출발

            04시 여원재 도착 택시로 뱀사골 심원마을로하여 성삼재 도착

◎ 일기 : 약간 흐린 날씨

◎ 인원 : 단둘이

◎ 코스 : 성삼재 → 만복대 → 정령치 → 고리봉 → 고기 삼거리 → 노치샘 → 수정봉 → 여원재

◎ 산행거리, 시간 : 20.5km  (9시간 10분 소요)

 

◎ 만복대 :

지리산 서쪽끝의 만복대(1,433.4m)는 구례군 산동면과 남원시의 경계에 웅장한 모습으로

솟아오른 봉우리다.

 성삼재(1,090m)와 정령치(1,172m) 사이 대간 구간 가운데 가장 높은 꼭지점을 형성한 곳으로,

지리산에서 출발한 많은 종주대가 이곳을 거쳐 멀리 향로봉까지 산행을 이어가고 있다.

 만복대는 북풍한설에 피어난 설화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지만,

뭐라해도 지리산 최고의 억새능선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어울린다.

가을철이면 금빛으로 출렁이는 억새의 군무가 저 멀리 병풍처럼 둘러친

지리산 주능선의 웅장함과 어우러져 장쾌한 풍경을 연출한다.

 만복대는 이름만큼 복스러운 산으로 산 전체가 부드러운 구릉으로 되어 있다.

'만복대'란 명칭은 풍수지리설로 볼 때 지리산 10승지 중의 하나로 인정된 명당으로

많은 사람이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하여 만복대로 칭하였다는 설이 있다.

 만복대는 멀리서 보면 헐벗은 산 같지만 억새로 뒤덮혀 있어, 주변의 단풍과는 사뭇 다른 가을의 정취를 보여 주고,

노고단, 반야봉,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100리길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듯 조망이 좋다.

 만복대 일대는 1,000m가 넘는 고산지대로 억새철인 9월 말과 10월 초만 되도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심하게 떨어진다.

게다가 주변에 바람을 막아줄 만한 봉우리도 없어 체감온도가 매우 낮다.

 

◎ 정령치 : 

주천면과 산내면 사이에 있는 고개.
정령치는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에 의하면 마한의 왕이 진한변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장군(鄭將軍)을 파견하여 지키게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령재 정상에 올라서면 바로 눈 앞에 유순하게 흘러내리는 만복대가 다가오고, 운봉평야가 멀리 내려다보이는가 하면 꾸불꾸불하게 포장된 정령치 도로도 보인다. 반야봉의 큰 덩치가 시야에 잡혀 사방의 전망이 탁 트인게 시원하다.

◎고리봉 ;

금지면과 대강면 경게에 잇는 봉우리

이름은 섬진강을 거슬러  남원성오수정까지 올라오던 배를 묶어 놓았던 고리가 어딘가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고리봉을 기점으로 하여 남쪽으로는 전라남도 곡성의 명산인 동악산이 북쪽으로 삿갓봉·두바리봉·문덕봉과 이어지며, 남쪽 가까이에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다.

 고리봉은  지리산을 가까이에 두고 그 맥을 달리한다.

수려한 산세와 암봉이 이어지는 봉우리는 설악산의 일부를 옮겨 놓은 모습이다.

남원시를 벗어나  17번 국도를 따라 전라남도 곡성 방면으로 남서진하다가 보면

금지평야 너머에 가로막고 솟은 바위산이다.

 

◎ 수정봉 :

  수정봉마치 학이 날개를 피고 날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수정봉노치마을에 옛날 민씨(閔氏)라는 거지가 살았는데 그는 짚신을 삼아 팔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민씨가 죽어 눈 덮인 산을 헤매어 시체를 매장하려는데 신기하게도 시체의 관이 알맞게 들어갈 만큼 눈이 녹아 있는 곳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곳에 장사를 지냈는데 바로 그 자리가 용은 용인데 주인이 없다는 황룡무주(黃龍無主)의 명당이었다.
이 묘를 쓴 뒤 그 후손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묘에 호화롭게 석물을 세우고 보수를 한 뒤로는 자손들이 뜻밖에도 나쁜 일을 당해서 다시 석물들을 없앴더니 화가 없어졌다고 한다. 돌이 무거워 학이 날지 못했다는 것이다.

높이 804.7m로 운봉주천, 이백의 삼 개 읍면에 걸쳐 있다. 백두대간의 맥에서 가장 극적인 분수계를 만나는 봉우리로 남원에 들어선 백두대간매요리-고남산-여원치-입망치를 지나면 수정봉에 다다른다. 수정봉에서 바라보면 벌판 너머에 지리산 자락이 펼쳐진다.
『산경표』에서 말하는 백두대간을 비롯한 1정간 13정맥 모두는 하천을 둘러싼 하천의 유역분지 분수령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가장 큰 백두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한반도 물줄기를 동서로 가르는 주맥으로서 가장 큰 분수령맥이다. 이런 백두대간수정봉에 다다르면 더 이상 능선을 타고 지리산으로 갈 수가 없다.

수정봉에서 좌우 즉 덕산저수지로 빠지는 낙동강 물줄기와 노치마을에서 왼쪽으로 빠지는 요천, 섬진강 물줄기를 건널 수가 없는 것이다. 오직 이 좌우 물줄기가 나누어지는 노치마을 길을 따라서만이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즉 평지가 산이 된 셈이다.

그러나 김정호『대동여지도』를 보면 이 길을 따라 정확하게 산길을 이어 놓았다. 그리고 이런 분수계를 따라 운봉읍주천면의 경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평지가 산이 되는 곧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을 정확하게 지키는 구간인 것이다. 오히려 이런 극적인 구간이 있는 이곳을 더욱 알려서 조상들의 정확한 분수계 설정과 백두대간의 의미를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수정봉운봉분지를 에워싸는 북서산릉의 한 봉우리로 화강암이 변성받은 암석으로 이루어졌다. 심층풍화된 남원화강암의 운봉분지에 비해 풍화에 강한 암질 산으로 남아있다. 오랜 지질시대엔 정령치에서 구룡폭포로 빠지는 물줄기가 24번 국도를 따라 낙동강쪽으로 흘러갔으나 급사면의 구룡천이 상류쪽으로 심하게 침식이 진전되는 두부침식(頭部侵蝕)에 의해 정령치 물줄기와 만나면서 정령치 물줄기는 방향을 바꾸어 구룡천으로 흘러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하천이 흐르지 않는 구간이 낙동강섬진강의 분수계가 된 것이며 이를 백두대간을 이어주는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로 보는 것이다.

 

◎ 여원재 :

전북 남원시 운봉읍과 이백면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의 고개로서, 산줄기는 고남산과 수정봉을 잇고,

물줄기는 낙동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다.

고려 말(1380년, 우왕 6년) 이성게가 황산전투에 임할 때 어느 노파가 꿈에 나타나 고남산 산신단에 올라 3일간 기도하고 출전하라고 알려 주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한다.

이성게는 꿈 속의 노파가 고갯마루에서 주막을 운영하다가 왜구의 괴롭힘으로 자결한 주모였다고 믿고 노파를 위로하 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여원이라 불렀는데 그때부터 이 고개 이름이 여원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여원재의 서쪽 약 200m 지점에는 황산대첩 승리에 대한 보은의 뜻으로 만들어진 마애불상(전북유형문화재 제162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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