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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빗방울이 연잎에 고이면

by 嘉 山 2008. 9. 24.

빗방울이 연잎에 고이면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는가?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는가?

 마르틴 부버가 <인간의 길>에서 한 이 말을 눈으로만 스쳐 지나지 말고 나직한 자신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소리를 내어 읽어보라.

자기 자신에게 되묻는 이 물음을 통해 우리 각자가 지나온 세월의 무게와 빛깔을 얼마쯤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을 강타한 지진으로 수만 명의 목숨을 잃었다는 보도를 보다가,  류시화가 엮은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는 법정 잠언집을 꺼내들고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꼭 그래야 될 것만 같은 생각에, 법정 스님이 시키는 대로 눈으로만 읽는 게 아니라 나직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소리를 내며 읽었습니다.

그러자 문득 내가 이제까지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사람을 만나 내 마음을 얼마만큼 주고받았는지를 생각해봤습니다.



미국의 철학자 마르쿠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풍요로운 감옥에 비유했지요. 감옥 속에 냉장고와 세탁기가 갖춰져 있고, 텔레비전 수상기과 오디오가 놓여 있으며,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자신이 그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말입니다.

법정 스님은 이런 풍요로운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이고,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서야 한다고 말하지요.

나는 누구인가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날 때까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것도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같은 생물이면서도 사람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되돌아보면서 반성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나는 누구이고,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또 물으면서 ‘연잎의 지혜’를 배우라고 하지요.



“빗방울이 연잎에 고이면, 연잎은 한동안 물방울의 유동으로 일렁이다가 어느 정도 고이면, 수정처럼 투명한 물을 미련 없이 쏟아 버린다.

그 물이 아래 연잎에 떨어지면, 거기에서 또 일렁이다가 도르르 연못으로 비워 버린다.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무게만을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비워 버린다. 그렇지 않고 욕심대로 받아들이면, 마침내 잎이 찢어지거나 줄기가 꺾이고 말 것이다. 세상사는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생의 대부분을 홀로 산속 오두막에서 수행하며 지낸 법정 스님이 30년 넘게 써온 글과 법문에서 가려 뽑은 것들로 엮은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는 무소유, 자유, 단순과 간소, 홀로 있음, 침묵, 진리에 이르는 길과 존재에 대한 성찰이 화두처럼 우리를 일깨워주는 책이라 하겠습니다.

 세상의 먼지가 온 몸에 두드러기 같은 부작용을 일으킬 때, 청정한 소나무 숲에서 며칠 동안 경험한 삼림욕처럼 우리의 의식을 정화시키는 영혼의 울림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래서 엮은이는 말하지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이 잠언집은 여느 책처럼 그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고 덮어두기에 어울리는 책이 아니며, 오히려 끝까지 읽지 않아도 옆에 오래 놓아두어야 할 책이라고. 하지만 자리에 앉아 한 번에 다 읽었습니다.

 그것도 또박 또박 소리를 내면서 말입니다. 그런 다음 법정 스님이 좋아하신다는 황산곡(黃山谷)의 시(詩) 한 구절을 읊조려 보았습니다.



“가없이 넓은 하늘에 구름이 일고 비가 오다.

빈산에 사람이 없는데도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萬里長天 雲起雨來 空山無人 水流花開)”

출처 : 목포 뚜벅이 산악회
글쓴이 : 嘉 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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