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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금자리

by 嘉 山 2020. 6. 10.

보금자리 / 황정혜

남편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리(지금의 익산)에서 목포로 이사 했다. 아이들이 많다는 이유만으로도 방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금방 들통 나지만 자식을 둘만 앞세우고 거짓말 했다. 나머지 아이들은 이사할 때 때 데리고 가는 것이다. 허구한 날 손 맞는 주인집 애들과 치고받고 싸움질했다. 자존심 때문일까, 오기와 끈기가 강해서인지, 속이 상한 주인집 아주머니의 심기를 건드려 쫓겨나기 일쑤였다. 높은 언덕배기에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을 구했다.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으니 마음은 편했다. 비가 줄줄 새는 초가지붕은 파란 포장으로 감싸고 줄로 단단히 묶었다. 집은 초라했지만 넓은 마당이 있어 아이들이 뛰어 놀기 좋았다. 더는 이사를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부모님은 먹고 살려고 장사에 매달렸다. 어린 동생들은 장남인 남편의 몫이었다. 공동수도의 물은 꼭 새벽에 나온다. 학교 가기 전에 수십 통을 물지게로 짊어지고 나른 다음 학교로 갔다.

 

남편은 연애 시절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오직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결혼을 했다. 아버님은 며느리가 들어오니 이 집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하셔서 차관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주택난을 없애려고 미국 차관을 들여와 북항을 매립해서 지은 집들이다.시댁에는 시부모님 그리고 남편과 나이 차이가 많은 네 명의 어린 시동생들이 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는 분홍빛 수줍은 꿈을 꾸었다. 서툰 솜씨로 해드리면 무슨 음식이든 맛있다고 해주시는 시부모님이 고마웠다. 따라서 잘 먹는 시동생들도 예뻤다. 된장찌개도, 수제비도, 국수도, 있는 게 한정이었다. 또르르 말아진 삼겹살을 사서 한아름 안고 오는 날은 파티를 했다. 한 통에 500원 하는 수박을 사람 수 대로 사서 시원하게 먹고 어린 조카의 분유를 훔쳐 먹는 즐거움을 누렸던 시동생들은 이 시기를 천국의 시대라고 지금도 말한다. 이때는 남편이 군 복무 중이었다.

남편이 제대하고 집안 분위기는 많이 바뀌었다. 어린 동생들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남편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고약한 남편과 어느 날은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웠다가 또 뜨겁게 화해하고 그만큼 눈물 나게 사랑을 나누었던 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아이들이 눈 맞추고 웃어주는 그 행복에 고단함을 씻고 다시 일어서게 했던 집이었다. 아이의 기저귀를 눈처럼 하얗게 빨아 빨랫줄에 널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이 환하게 맑아졌던 집, 크기가 각기 다른 열두 켤레의 신발들이 소란 했던 집.

 

집에는 작은 꽃밭이 있다. 포도나무를 심었다. 자라서 마당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포도가 열려서 많이 따 먹기도 했다. 어린아이들이 결막염으로 안과를 자주 다녔다. 의사선생님이 집에 포도나무가 있는지 물으셨다. 꽃가루 때문에 결막염이 자주 걸린다고 하셨다. 포도나무가 사라지고 감나무 대추나무 등 유실수를 심었다. 키도 커지고 제법 무성해졌다. 병원 정기검진에서 종양제거 수술을 해야 하는데 빈혈이 심하니 철분제를 먹고 한 달 뒤에 수술하기로 한 적이 있었다. 의사 선생님 말 한마디에 그날부터 정말 앓아 누웠다. 어느 날 꿈속에서 할머니들이 나타나셔서 "이렇게 동쪽에서 뜨는 해를 다 가리니 아플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시며 나뭇가지들을 잘라내셨다. 아버님은 그 나무들을 당장 베어 버리셨다. 신기하게도 종양이 없어졌다. 집은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도 함께 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시동생들을 분가시키고 시부모님도 가까운 곳에 보금자리를 잡았다. 시동생들이 야구를 하고 농구를 하던 마당은 손주들이 비눗방울 놀이를 하고 세발자전거를 탄다. 집은. 친구처럼 함께 늙어가는 곳이었다. 종종걸음으로 보낸 오늘도 이 한 몸 뉘일 작은 보금자리가 있어서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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